김기덕 감독 "오늘이 내 제사 같은 느낌"

"마치 이 자리가 김기덕의 제사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도 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늦었습니다."

작년 '활' 개봉 때부터 국내 언론과 담을 쌓고 지내던 김기덕 감독이 1년여 만에 봇물 터진 듯 속내를 털어냈다.

김 감독은 7일 오후 종로 스폰지하우스(구 시네코아)에서 열린 신작 '시간'의 시사회에서 그동안 꽁꽁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지난해 '활'을 단관 개봉 형식으로 관객에게 선보였던 김 감독은 '시간'은 아예 국내 개봉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의 국내 판권을 영화사 스폰지에서 구입하면서 24일 극적으로 개봉하게 됐다. 하마터면 '시간'은 해외 영화제와 해외 개봉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을 뻔 했다.

검정 선글라스를 쓰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김 감독은 회견 초반 질문에 대해 모두 단답형으로 대답을 하거나 아예 답변을 회피하기도 하는 등 기자회견에 뜻이 없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던 그가 20여분의 회견 말미에 마이크를 잡고 닫아두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일단 제 태도를 너무 무례하게 보지 말아달라"고 전제한 김 감독은 "작년 '활'과 거슬러올라가 '빈집'을 개봉하면서 마음의 변화가 있었던 듯하다. 마음이 다른 방향으로 전환된 시기는 '빈집' 이후였다. '빈집'이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자 '활'은 아예 개봉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활'을 단관 개봉했지만 일주일이 안돼 전국 순회 상영이 중단됐습니다. 그후 마음 먹은 것은 '시간'은 개봉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한번 먹으면 절대 뒤로 안 돌아가는 성격입니다. 어떤 좋은 조건이 주어져도 이미 늦은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제 영화가 어떤 의미가 있어도 이제는 개봉을 안 할 것입니다."

그는 이어 "그렇다면 '시간'은 왜 개봉하느냐고 묻는다면 외국에 판매한 것과 같이 한국에서 이 영화를 수입했기 때문이다. '빈집' '사마리아' 등의 영화가 20개국 이상에 수출됐다. 대한민국도 '시간'을 수출한 나라 중 하나라 생각한다. 오늘 기자회견에 참석한 것도 미국에서 내 영화가 개봉할 때 프로모션에 참여한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어쩌면 '시간'이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내 마지막 영화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제 말을 협박 혹은 불만, 또는 하소연으로 들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시간'의 개봉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개봉은 결정되겠지요. 또 더 이상 부산영화제를 비롯한 국내 어떤 영화제에도 내 영화를 출품하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결정이 스스로 장애물을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영화감독을 더 이상 할 수 없겠죠. 아마 다른 직업을 찾아야겠죠."

김 감독은 이 대목에서 선글라스를 쓴 이유에 대해 "안경을 쓰고 인터뷰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늘 안경을 쓴 것은 내가 아는 분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야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13편을 만들었고 그 영화들은 대부분 좋은 기억을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꼭 관객 수치에서 오는 부가가치가 아니라 관객의 이해 부분에서 부가가치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작업을 함께 하고픈 배우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들과 작업을 못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스폰지에서 수입해서 개봉하지만 앞으로 내가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면 국내에서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에 배우들이 출연하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김 감독은 현재 차기작에 대해서도 "그냥 아무 생각이 없다. 다음 작품으로 준비하는 것이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렇듯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그는 마지막에서는 또렷한 바람을 드러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이 있다면 이 영화가 관객 20만명만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 미국에서 32만명이 들었고, '빈집'이 프랑스와 독일에서 20만명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국내에서 20만명이 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죠."

한편 그는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1천만 관객 시대가 슬프게 느껴진다"는 발언과 연관지어 최근 '괴물'의 흥행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질문에 "가장 피 흘리는 감독으로서 한국영화의 수준과 한국관객의 수준이 잘 만난 최정점이라 생각한다. 이는 부정적이기도 하고 긍정적이기도 한 말이다"라고 밝혔다.

올해 체코 카를로비 바리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한 '시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는 사랑과 그를 지키기 위해 성형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리는 남녀의 이야기로 성현아, 하정우가 주연을 맡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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