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짜'는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준다.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 유해진, 김윤석 등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는 인상.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의 묘미는 원작과 전혀 다른 지향점을 명시하는 한편 숨막히는 긴장감을 이끌어낸 최동훈 감독의 치밀한 구성력과 연출력에 있다.
상업영화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던 최동훈 감독이 두 번째 작품을 통해 규모의 확장을 시도했다. 내용과 형식 모두 '범죄의 재구성' 때보다 훨씬 더 크고 깊어진 느낌이다.
배우만큼이나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몸살을 앓을 지경인 최 감독은 "인터뷰 끝나고 영화아카데미 친구들과 술 한잔 마시는 것으로 피로를 푼다"고 말했다. "감독은 뒤로 빠져 있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하면서도 최 감독은 자신의 작품과 배우에 대한 이야기를 쉼 없이 풀어놓았다.
◇세 번 거절 끝에 수락한 이야기
'범죄의 재구성'이 끝나고 난 후 영화 '타짜'의 영화화 제안이 들어왔다. "이미 읽어봤지만, 도저히 영화로 만들 수 없다"며 두 번을 거절했다. '범죄의 재구성'을 만들 수 있게 기회를 줬던 차승재 싸이더스FNH 대표가 또 제안했다. 역시 거절. 그러나 차 대표는 "다시 읽어보고 거절해라"고 권유했고, 다시 보니 재미에 흠뻑 빠져들어 결국 승낙했다.
"'이걸 하면 고생길이 훤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정 후 허영만 선생님을 만나 '원작이랑 다르게 가도 되겠습니까'하고 여쭸더니 '아 이 사람아, 원작하고 똑같으려면 뭐하러 영화를 만들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정말 멋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요."
앉은 자리에서 세 번을 내리 읽은 뒤 6개월 동안 표지를 들춰보지도 않았다. 대신 기본 얼개를 12장 짜리 종이에 써놓았고, 시나리오는 이 종이를 바탕으로 쓰였다.
◇원작의 구조를 해체-재건
"원작의 뉘앙스를 살리되 내 식으로 하려니 시나리오 초안을 쓰는 데만 1년이 걸렸다"는 최 감독은 "제일 먼저 한 작업이 구조를 바꾸는 것이었다. 원작이 오디세이라면 이걸 원형적 구도로 바꿔 한 편의 운명론적 이야기로 풀어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인물이 김혜수가 연기한 정 마담. 원작에는 미미했던 존재인 정 마담은 영화의 드라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인물로 재탄생했다.
"정 마담이 등장할 때마다 드라마가 바뀝니다. 가장 달콤하면서도, 가장 쓴 것. 집착과 광기를 가장 강하게 지니고 있는 인물이지요."
최 감독은 '타짜'의 얼개에 대해 설명했다.
"영화의 기본 플롯은 고니가 아귀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보조 플롯이자 드라마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것은 고니와 정 마담의 관계지요. 고니의 심리적 변화나 내적 성장은 정 마담으로 인해 비롯됩니다."
◇이유 있는 캐릭터
고니(조승우)는 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평경장(백윤식)을 죽였다는 이유로 아귀(김윤석)를 찾아간다. 그러니 고니는 진짜 타짜가 아니라는 게 최 감독의 말이다. 왜일까.
"타짜의 목표는 무조건 이겨 돈을 따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타짜는 타짜를 피하지요. 그런데 고니는 평경장을 죽였다는 이유로 타짜 아귀를 찾아갑니다. 고니의 목표는 돈이 아니지요. 돈이었다면 마지막 승부에서 그럴 수 없습니다. 고니는 타짜가 아닌 절대지존이라는 아귀를 목표로 한 '승부사'입니다."
정 마담은 가장 사악한 캐릭터이면서 가장 도박판의 현실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최 감독은 "그러나 관객이 절대 정 마담을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우리 모습이어서가 아니라 정 마담의 속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게 연민이든, 동정이든, 투사이든 간에"라며 고니만큼이나 정 마담에 공을 들였음을 은연중 드러냈다.
◇"내 작업의 본질은 '수정'"
혀를 내두를 만큼 치밀한 구성. 앞뒤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설정은 놀라움을 준다. 그는 감독이기 이전에 분명 뛰어난 작가이기도 하다.
"전 제가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한 적 없습니다. 제 작업의 본질은 '수정'이지요. 박찬욱 감독이 언젠가 '(비록 지금 그 수준이 아니더라도) 작가의 눈은 높아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만족할 때까지 수정합니다. '범죄의 재구성'도 17번이나 수정했으며 '타짜'는 시나리오 작업만 2년 걸렸습니다. 거의 모든 대사를 외울 수 있을 정도지요."
그리고 그는 혼자 거울 앞에서 대사와 연기를 직접 해본다. 그럼 뭘 잘못 썼는지 안다는 것. 그래놓고도 배우에게 '(감독이자 작가인) 내가 하라는 대로 해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역을 해야 하는 배우는 내내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바로 고치지요. 결국 연기는 배우가 하는 거니까요."
◇"전형적인 건 싫다. 형식미가 있어야 한다"
이야기를 담는 형식도 역시 진화시킨 최 감독은 "좋은 이야기를 하는 만큼 전형적으로 끌고 가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형식미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허무할 정도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것. 그러나 그 배경은 특별했다.
"여기에는 관객에 대한 '확신'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넓게 벌려놓아도 관객이 이해할 것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제가 이 부분에서 이 정도만 언급해놓아도 관객은 미루어 짐작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쉽게 가고, 길게 끌고 가도 지루해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는 대목은 길게 갑니다. 핵심이 무엇인지를 관객이 알아차린다고 보는 거지요."
최 감독은 한국 영화 관객의 수준이 높아져 여러 개의 이야기를 동시에 끌고 가도 관객이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타짜'는 두뇌게임형 영화가 됐나 보다. 인물의 성격과 사건의 배경이 촘촘히 얽혀 있다.
◇차기작은 슬픈 스릴러?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존재감을 확실히 심어놓은 최 감독에게 이르지만 차기작 장르를 물었다.
"멜로는 내게는 재미가 없어 날 끌어당기지 못한다. 실패한 멜로라면 또 모를까"라면서 그는 "슬픈 스릴러 영화를 하고 싶은 꿈은 있다"고 말했다.
한국 영화계 취약 장르 중 하나가 스릴러. 그는 그 이유를 "문학적 토양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스릴러는 원작이 있습니다. 앨프리드 히치콕도 3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죠. 그런데 우리에겐 스릴러의 문학적 토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원작이 없다면 그걸 시나리오 작가가 새로 써야 한다는 건데, 그건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니 제가 이 장르에 도전한다면 시나리오 작업만 또 2년 넘게 걸릴 겁니다."
'타짜' 시사회 이후 가장 기분이 좋았던 건 배우들에 대한 칭찬이 쏟아졌던 점이다.
"좋은 작품을 만나면 배우가 뜨게 돼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배우가 보이는 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범죄의 재구성' 때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배우 진용이 정말 좋았습니다. 배우들과 이야기하고 만들어가는 과정이 무척 재미있어 영화 작업도 재미있었죠."
배우들도 똑같이 최 감독과의 작업에 흥분했으니 시너지 효과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참. 그는 인터뷰 말미에 여자친구 자랑을 슬쩍 풀어놓았다. "내 글을, 내 영화를 보고 평하는 최초의 비판자인데 늘 받아들여야 할 말만 한다"고.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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