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딤 레핀은 동년배(35)인 길 샤함, 막심 벤게로프와 더불어 20세기 후반부터 주목받던 바이올린계의 신동이다.
러시아 출신으로 자카른 브론을 사사한 어린 시절 경력은 특히나 벤게로프와 겹치면서 아주 일찍부터 그들은 독특한 경쟁 구도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다른 두 명의 연주자가 한국에 비교적 자주 들러 리사이틀이며 앙상블 콘서트 무대를 마련했던 데 비해 레핀은 KBS교향악단과 더불어 시벨리우스 협주곡을 연주했던 것이 전부였다.
이번 두 번째 무대 또한 KBS향과의 공연이었으며, 이번에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선택했다.
벤게로프의 연주가 선이 굵고 호쾌한 반면 다소 투박한 매력이 있다면 레핀의 연주는 그와 정반대로 선이 아주 가늘고 섬세하며 날카로운 이성이 돋보이는 스타일이었다.
9월2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나타난 그의 연주는 그러나, 안정되다 못해 여유가 넘치는 기교라든가, 화사하게 빛나는 비브라토, 화려하고 완벽했던 카덴차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지휘자(유베르트 수당)가 선택한 다소 느린 듯 애매했던 연주 템포안에서, 베토벤 협주곡의 난해하기로 유명한 프레이징이며 아티큘레이션을 너무도 명징하게, 또한 손쉽게 넘나들고 처리해 작품 전체를 이미 완전히 꿰뚫고 있음을 증명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협연자는 자신이 주도권을 100% 잡기보다는 지휘자와의 공생을 선택하였으며, 결국 오케스트라와 바이올린은 화합과 교감을 통해 평화롭고 안정되게 연주를 완성시켰다. 3악장 카덴차는 베토벤 협주곡 전체를 통틀어 레핀이 자신의 음악성을 가장 자유롭게 펼쳤던 순간이었다.
수 차례의 커튼 콜을 받은 레핀은 KBS향 현악 파트의 반주에 맞추어 파가니니의 '베니스의 사육제'를 연주하며 스타카토에서부터 더블 피치카토에 이르기까지 빼어난 기교를 과시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다.
2부 순서로 연주된 브루크너 교향곡 7번은 오케스트라의 성실한 자세가 인상적인 무대였다.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바그너 튜바까지 등장할 만큼 작품에 어울리는 구색을 맞추고자 노력한 모습이 돋보였지만 의외로 편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수당의 지휘는 브루크너 연주에서는 보기 드물게 날렵하고 잔 동작이 많았으며, 단원들 모두가 혼신의 힘을 다하는 열정이 객석까지 전달되었다.
여러 파트 가운데에서도 특히 트롬본의 기량은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현파트의 경우, 크지 않은 편성 탓인지 브루크너 교향곡 특유의 풍성한 화성 대신 다소 앙상한 앙상블이 이루어졌으며, 이 교향곡의 허리격인 목관 파트 또한 고전을 거듭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KBS향의 레퍼토리를 확장하고자 노력하는 꾸준한 시도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이번 브루크너 7번 교향곡은 최근 들어 두 번째 연주였으며 지난번 첫 번째 연주보다는 전반적으로 우수했다는 평이다.
주목받는 해외 유명 아티스트와의 협연 또한 오케스트라의 지명도와 연주력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이다. 레퍼토리와 초청 지휘자, 협연자 등 프로그램의 구색을 비교해 볼 때 KBS향의 수준은 여전히 최고를 고수하고 있다.
악기란 연주를 하지 않으면 망가지게 마련이며, 그 중에서도 오케스트라는 가장 연주량에 민감하다 할 수 있다.
재단 독립 문제 등 행정적, 재정적인 고민에 둘러싸여 있는 KBS향의 현 위치는 서울시의 탄탄한 후원을 받고 있는 서울시향의 그것과 분명 상반된 모습이긴 하다.
그들에게 '헝그리 정신'과 같은 애매하고 무모한 열정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견 단원들의 탄탄한 기량과 반세기가 넘도록 축적된 경험에서 우러나올 수 있는 잠재력이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잠식되어 버리지 않기를 부디 기대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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