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비평/시흥챔버오케스트라 특별기획연주회 ‘도시풍경 2006’

미래를 더 기대하게 하는 음악회

‘음악’을 만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관문은 실로 험난했다. 지난 17일이었다. 공연장소인 시흥 실내체육관은 외곽에 위치하고 있고 교통편도 좋지 않아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려 도착할 수 있었고, 그렇게 찾아간 실내체육관 내부 환경 또한 “과연 이곳에서 음악회가 가능할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음악을 위해 부적합했다.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듣게 되는 음악은 양철상자 속에 틔운 어린 싹처럼 반갑고 소중했다. 험난한 조건을 감수하면서도 이어나가는 공연은 시흥챔버오케스트라의 현재 연주활동에 대한 애정을 짐작케 하고 또한 그 조건이 개선됐을 미래의 연주에 기대를 갖게 하기 때문에 소중하다.

이날 공연이 반가웠던 건 창작곡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는 점이다. 창작곡들은 전문인들의 폐쇄적인 발표회장에 머무르고, 공공음악회에선 지나친 대중 추수주의가 대세인 요즘 음악계 기류 속에서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과감하게 창작곡들을 선보이는 음악회를 기획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 공연에서 연주된 창작곡들은 이날 지휘를 맡은 홍요섭의 ‘Voyage for Orchestra’와 교향시 ‘온고지신’ 그리고 ‘Mong for Violin & Piano’, 한재필의 ‘The Beautiful Siheung’ 3악장과 ‘도시풍경’, 그리고 여기에 이문승과 한재필의 창작 가곡 몇 곡이 더해져 양적으로 풍성한 레퍼토리들로 구성됐다.

홍요섭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두 작품은 현대적 음재료들을 사용하되 재료 자체에 맹목적이지 않고 전통적인 어법과 조화를 이루며 짜임새 있게 구성됐음을 느끼게 했다. ‘Voyage’에선 반음계적 소재를 조성적 맥락과 무조적 맥락에서 자유롭게 다뤄 악곡의 색깔을 특징적으로 했고 한국 전통 음악의 음계와 리듬적 요소를 도입한 ‘온고지신’은 이같은 특징이 한국적인 색깔로 두드러지게 하는 상투적인 수법을 벗어나 주제를 여러 방향으로 산개시키고 발전시키는 대상 혹은 방법으로 작용돼 작품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다만 두 작품의 전체적 통일성은 자칫 일원적인 것으로 환원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고 ‘Voyage’에선 자극적인 음향을 다소 남발하며 분위기는 과잉상태가 지속됐다. 결국 악곡 전체에서 긴장감의 변화폭은 넓게 활용하지 못했고 줄곧 단일한 질감으로 일관되게 채색될 수 밖에 없었다. 논리적으로 충실한 어떤 악곡이라도 음향적인 굴곡을 갖추지 못한다면 지리멸렬해지고 듣는 이가 감동할 여지는 줄어들게 된다는 점에서 이날 연주된 홍요섭의 다른 곡 ‘Mong’은 여백이 많은 텍스처를 잘 활용하며 단순하지만 다채로운 음향면을 드러냈는데 관현악곡에서 한계로 나타난 부분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공연 제목이 될만큼 비중이 컸던 교향적 모음곡 ‘도시풍경’은 여러모로 실망스러웠다. 이 작품은 생활-풍경-일터-풍경-갯골-예술-도전과 신념으로 이어지는 일곱 곡으로 구성됐고 각 악곡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묘사적인 음악에 가까운 성격을 지녔음이 확인됐다. 흔히 음악외적 대상에 대한 음악적 묘사처럼 느껴지는 교향시도 그것이 훌륭한 작품이 되는 요인은 음악외적 대상과의 관련이 아니라 음악내적 충실함에서 비롯됐음은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음악적 묘사 자체가 의미가 있을 경우 묘사되는 대상에 대한 진지하거나 혹은 재치있는 성찰이 기본이 되는데, 이 ‘도시풍경’은 음악외적 대상에 성찰이나 음악내적 충실함 모두 충분하지 못했다.

익숙하지 않은 창작곡들을 근 2시간동안 연주한 시흥 챔버오케스트라는 아직 기량이 원숙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느끼게 했다. 눈에 띄는 실수도 종종 드러났고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연주에서 확인됐듯 파트간 밸런스나 음악적 표현력도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연주회처럼 충실한 준비과정과 음악적 고민들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연주활동을 반복해 나아간다면 앞으로 더욱 비약적 발전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이날 연주회에서 들려준 사운드속에 그러한 미래가 잠재하고 있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인종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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