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어가 반드시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개그맨은 일반적으로 사상보다는 웃음을 터트리게 할 요소에 관심을 보이고, 작가도 대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말장난'에 신경쓰기보다는 스토리의 탄탄함에 무게 중심을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게 히트하는 유행어는 그 시대의 현실과 제대로 '코드'가 맞을 때 탄생하기 마련이다. 일반인이 공감하는 현실이 짤막한 유행어나 대사에 감각적으로 응축될 경우 대중은 "맞아 맞아"를 외치며 유행어를 습관처럼 따라한다.
올해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는 시대상을 반영한 다양한 유행어가 나와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 '유행어의 산실'인 개그 코너를 중심으로 영화, 드라마, 가요 등에서 인기를 끈 올해의 히트 유행어와 대사를 살펴본다.
◇백수 또는 텅빈 지갑-"대한민국에 안되는 게 어딨니"
올해는 어느 때보다 서민의 살림살이가 팍팍했다. 경기 침체의 골이 깊었고, 부동산 가격은 폭등했다. 취업 준비자들과 '백수'들은 곳곳에 넘쳐났다.
전국의 백수들은 올 초 KBS 2TV '개그콘서트-현대생활백수'에서 고혜성이 보인 활약상을 보고 웃으며 잠시 시름을 잊었다. 꾀죄죄한 체육복을 입고 취업을 준비하는 고혜성은 늘 후배 강일구에게 어이없는 '청탁'을 한다.
"대한민국에 안되는 게 어딨냐"며 "(어떻게) 안되겠니"라고 사정해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씁쓸한 현실과 '백수의 생존전략'이 어우러진 유행어다.
하반기에는 '육봉달 회장' 박휘순이 '개그콘서트'에서 고시생 '노량진 박'으로 변신했다. 그가 외치는 "조용히 좀 해 줄래. 너무 시끄러워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잖아"라는 말에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취업 준비생의 고달픈 애환을 담았다.
역대 최고 흥행 영화 '괴물'에서는 어수룩한 가장 송강호가 서민의 아픔을 대변했다. 딸을 잃은 슬픔이 크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심정은 영화 마지막 부분의 "밥 먹자"라는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힘 없는 서민으로 등장하는 그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이리 밀리고 저리 채인다. "사망잔데요. 사망을 안 했어요…"라는 그의 인상적인 대사에는 어디에서도 '말빨'이 통하지 않는 우리 서민의 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셈이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는 자장면이 들어간 대사가 유난히 돋보였다. 한예슬의 "지나간 자장면은 돌아오지 않아"는 네티즌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 드라마에서 자장면은 추억과 서민적인 음식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허영 또는 가식-"김기사~ 운전해. 어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
영화 '타짜'에서 김혜수가 한 명대사다. 영화에서 어느 누구도 그에게 출신 학교를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난데없이 '이대' 출신임을 강조한다.
도박장을 전전하는 '마담' 김혜수에게 이대는 단순한 대학교가 아니었다. '험한 일'을 하는 그에게 고상함을 덧씌워주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게 하는 '허영의 무기'였다.
사실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꼬집는 말은 개그 코너, 드라마, 영화 등에서 자주 등장한다. 위선으로 가득찬 이를 비꼬면 쉽게 웃음과 대중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올해 최고 유행어로 꼽히는 "김기사 운전해~ 어서"도 이런 맥락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유행어를 탄생시킨 MBC TV '개그야'의 '사모님'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비싼 명품을 걸쳤지만 머리에 든 것은 별로 없다.
'회장님'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신세지만 '김기사' 앞에서만큼은 당당하다. 실속은 있건 없건 간에 적어도 김기사만큼은 언제든지 운전을 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SBS TV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형님 뉴스'는 "남자가 남자다워야 남자지" "뉴스가 뉴스다워야 뉴스지" 등의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이 말에 사람들이 박장대소한 것은 그만큼 우리 주위에는 남자답지 못한 남자, 뉴스답지 못한 뉴스가 많기 때문은 아닐까.
가식에 가득한 이들이 이처럼 목소리를 높이면 개그맨 강유미가 참다 못해 한마디 툭 던진다. '개그콘서트-봉숭아학당'에서 방송 기자로 출연하는 그는 "가식적인 말씀 고맙습니다"라고 뉴스 리포트를 마친다.
◇윽박 또는 자학-"꼬라지 하고는~."
늘 마찬가지였지만 올해도 사람들은 남을 짓밟아야 내가 사는 냉혹한 세상을 겪어야 했다. 그것도 아니면 스스로 자학하며 '냉면의 면발'처럼 쥐죽은 듯 오래 버티는 게 삶의 지혜로 받아들여졌다.
올해 최고 인기 드라마 MBC TV '주몽'에서는 대소왕자 김승수가 실수가 잦은 영포왕자 원기준에게 "이런 한심한 놈"이라고 다그쳤다. 이렇게 당한 영포왕자는 자신의 부하들의 뺨을 때리며 "이런 한심한 놈"을 외치며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했다.
한예슬은 MBC TV '환상의 커플'에서 자신이 운영하는 회사의 직원은 물론 남편에게까지 "꼬라지하고는~"이라는 말로 공격한다. 이 말은 극중 한예슬의 성격을 반영하는 대사로 공감을 샀다.
개그계에서도 직설적인 입담이 인기를 모았다. 신봉선은 '개그콘서트-봉숭아학당'에서 "옳지 않아~"를 부르짖으며 상대를 윽박질렀다. 박명수는 "야야야!"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호통개그'로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이건 아니잖아'에서는 개그맨들이 이야기를 풀어가다가 꼬이면서 반전 상황을 맞게 되면 "이건 아니잖아"를 외쳐댔다. 스스로 자학하며 부르짖는 "이건 아니잖아"는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이 더 많은 요즘 현대인이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유행어인 셈이다.
자신의 이마를 내내 쳐가며 숨가쁘게 관객에게 대사를 읊어대는 마빡이의 신세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고 느끼는 듯 큰 호응을 얻었다.
◇재미있는 가사 또는 감동 있는 대사-"돌리고 돌리고."
'난 이제 지쳤어요 땡벌 땡벌'부터 '돌리고~돌리고~'까지.
드라마와 영화 속에서 대사처럼 자주 사용돼 인기를 모은 노래 가사다. 재미있는 가사와 중독성 있는 멜로디가 인상적인 이 가사들은 드라마와 영화의 인기를 등에 업고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강진의 '땡벌'은 영화 '비열한 거리'에서 조인성이 부른 것을 비롯해 드라마 '소문난 칠공주' 등에서 잇따라 선을 보였다. 가수 오승근의 '있을 때 잘해'도 '소문난 칠공주'에서 나문희가 흥겹게 불러 시청자에 입에 오르내렸다. 박현빈의 '곤드레 만드레'도 각종 오락프로그램에서 감칠 맛 내는 노래로 자주 등장했다.
영화에서는 '왕의 남자'의 "너 거기 있고 나 여기 있지"가 인상적이다. 주인공 장생(감우성)과 공길(이준기)이 '장님놀이'를 하며 주고받는 이 대사는 영화 속 인물의 관계와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인기가 다한 '가수왕' 최곤(박중훈)과 매니저(안성기)의 끈적끈적한 우정을 다룬 '라디오 스타'는 박중훈이 남긴 "형이 그랬지. 저 혼자 빛나는 별은 없다며. 와서 좀 비춰주라"라는 대사가 두고두고 관객의 가슴에 깊이 남았다. 우여곡절 끝에 인기를 회복하게 된 최곤은 자신을 위해 뒤로 물러난 매니저를 애타게 찾으며 이 대사를 남겼다.
강동원이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남긴 "사랑합니다. 누나"는 '강동원의 누나'를 자처하는 수많은 여성팬의 가슴을 적셨다. 언어의 마술사 김수현, 노희경 작가도 각각 드라마 '사랑과 야망' '굿바이 솔로'에서 주옥같은 명대사를 남겼다.
유행어는 아니지만 시청자 사이에서 화제가 된 것은 바로 '차두리 어록'이다. 월드컵 때 아버지 차범근과 함께 해설 마이크를 잡은 그는 "제가 분데스리가 하위팀에서 뛰다보니" "저는 당시 후보여서 모르겠습니다" 등 진솔한 어투로 인기를 얻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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