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구 "평생 최고의 역 맡았습니다"

안정된 직업을 버리고 자신의 꿈을 찾아나서는 사람을 볼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온다. "철이 없다" 혹은 "멋지다". 물론 후자의 반응을 얻으며 세속적인 성공이 동반된다면 금상첨화.

인생의 아이러니는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실은 ○○가 되고 싶었는데 집안의 반대로 못했다"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런데 십중팔구 이러한 아쉬움은 다분히 습관(?)적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현재의 생활을 택했을 때는 사회ㆍ경제적인 실익이 꿈을 앞질렀기 때문이다.

여기 50대에 과감한 선택을 한 사람이 있다. 안정이 보장된 최고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뒤늦었지만 꿈에 '올인' 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전업주부인 아내와 대학교 3학년, 고등학교 2학년의 아들 형제가 있다. 가족은 그의 선택을 적극 찬성, 후원하고 있다. 참고로 이들은 가장이 번듯한 직업을 포기하면서 당장 가정 경제에 타격을 입게 됐다.

화제의 주인공은 전문 외화 번역가로 19년간 충무로에서 '고수' 대접을 받아온 조상구(53). 16일 경기 고양시 SBS 탄현 제작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13일부터 SBS TV 대하사극 '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의 책사인 '죽리' 역을 맡아 출연 중이다. 연개소문에 이은 중요 배역으로 '가슴이 바다처럼 깊고 머리 속에 우주가 통째로 들어 있는 사내'다.

"제 평생 최고의 역할입니다. 저한테 이런 역할이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도망가려 했어요. 자신이 없어서 말입니다. 저를 추천한 작가님과 PD님께 누가 될 것 같아서 겁이 났습니다. 너무너무 하고 싶었지만 제대로 해낼 자신이 없어 안 하려고 했어요. 지금요? 정말 감사하고 즐겁습니다."

배역과 연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그의 얼굴에서는 내내 순도 100%의 행복이 묻어났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따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죽리는 2003년 SBS TV '야인시대'에서 맡은 '시라소니' 이후 3년여 만에 찾아온 또 한번의 멋진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도인 비슷한 기인이면서 머리가 비상하며, 때로는 간신배 같은 느낌도 드는 묘한 인물.

"사료에 나온 인물입니다. 그것을 이환경 작가님이 재창조하셨죠. 맑은 눈을 가진, 강직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충신이죠. 하지만 간혹 '해해' 웃는 모습이 간신배 같은 느낌도 주는 독특한 캐릭터죠. 처음에는 캐릭터 톤을 잡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자신있습니다. '한번 멋지게 놀아보자'는 생각입니다."

장년의 연개소문을 맡은 유동근과 함께 13일 방송분부터 등장한 조상구는 13~14일 방송에서 '연개소문'의 시청률을 상승시킨 주요 동력이 됐다. '연개소문' 전편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사랑받은 김갑수의 수 양제에 이어 눈길을 사로잡는 캐릭터. 유동근의 카리스마 넘치는 묵직한 연기와 부드럽게 보조를 맞추며 극의 재미를 더하고 있다.

이쯤에서 번역 얘기를 했다. 대중에게는 '시라소니'라는 배역 이름으로 유명한 배우지만 그의 주업은 외화 번역이었다.

늘 연기를 하고 싶었고 여건만 허락하면 연기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배우 조상구에게는 사실 기회가 많지 않았다. 독특한 마스크와 개성 있는 연기로 1980년대 '지옥의 링' '이장호의 외인구단' 등의 영화를 통해 반짝 인기를 끈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개성은 곧 연기자로서의 장벽이 되고 말았고 4인 가족의 가장으로서 배우만 하기에는 생계를 꾸려가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전공(동국대 영문학과)을 살려 외화 번역에 뛰어들었고 연기에 대한 목마름과 상관없이 그 분야 최고봉으로 군림하며 필력과 재능을 과시해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비롯해 '레옹' '타이타닉' '맨인블랙' '피아니스트'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간 작품. 1천500여 편의 자막을 달았다.

"지난해 개봉한 '쏘우2'와 '데스티네이션3-파이널 데스티네이션'을 마지막으로 외화 번역에서 완전히 손을 뗐습니다. 이제는 절대로 안 합니다. 제 능력에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 안되겠더라구요. 뒤늦었지만 이제라도 연기에 집중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번역에서 손을 뗀 1년반은 그에게 '거절'의 시간이자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좋은 배역이 들어와서, 핑크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어 번역에서 손을 뗀 것이 아닌 것. 이 기간 그는 영화 '홀리데이' '날라리 종부뎐', 드라마 '오버 더 레인보우' 등에 잠깐 등장했을 뿐이다. 전업배우로서는 다분히 '심란'한 상황. 그럼에도 그는 "번역을 그만둬 무척 좋다"며 웃었다

"아내가 먼저 번역을 그만두라고 얘기해줘서 참 고마웠습니다. 하루 담배 세 갑씩 피워가며 잠못 자고 때로는 쓰러져가며 번역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거죠. 하지만 처음에는 너무 불안했습니다. 가족을 먹여살릴 길이 없잖아요. 아내가 부업을 알아보더라구요. 말렸습니다. '좀 아껴서 살고 내가 열심히 하겠다'면서요."

배우로서 무명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아르바이트 삼아 번역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번역은 연기를 해 본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실감 나는 자막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늘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었다.

"번역이 너무 싫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번역'이라는 단어 그 자체에 너무 미안합니다. 그것 때문에 먹고 살았고, 1~2년도 아니고 무려 19년을 동고동락해왔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무형의 '번역'은 제게 유형화됐습니다. 하지만 '번역'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번역하기를 싫어했는가를 말이죠. 그게 인생의 아이러니인 것 같아요. 저는 연기하고 있을 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이제는 연기만 할 겁니다."

다시 '연개소문' 얘기로 돌아왔다.

"'시라소니' 이후 액션을 하는 역만 들어왔어요. 그게 너무 싫었습니다. 소모품 같기도 하고…. 사극도 장수 역만 들어오더라구요. '시라소니' 역시 최고의 캐릭터였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책사 역을 맡은 겁니다. 집에서도 굉장히 좋아해요. 그동안 웃는 연기를 한 적도 없고 매번 어디가 절단돼거나 마지막에 죽어나가는 역을 맡았는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잖아요?(웃음)"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 '돌아온 배우' 조상구가 신년 벽두 의미심장한 화두를 던진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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