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저 포도, 시다’는 건가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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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좋다고 민생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엊그제 밤 10시, 텔레비전으로 방송된 신년 특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민생파탄이란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우겼다. 오늘의 민생문제는 김대중 정부의 가계위기, 김영삼 정부의 IMF 사태에서 물려받은 것이라며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스의 소피스트(Sophist), 궤변학파는 예컨대 화살이 시위를 떠나 과녁을 꿰뚫었는 데도 화살은 날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화살이 날아간 시간대를 무한대로 쪼개어 구분한 어느 한 순간은 날지 않는다는 것이다. 궤변을 변론의 능사로 삼은 곡론가(曲論家)들인 것이다.

양극화 해소를 민생문제 해결의 전제로 내세우면서 양극화는 미국이나 일본에도 있다고 예를 든 것은 무책임한 논리의 비약이다. 민생안정을 미국이나 일본 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저 큰 빚 안 지면서 노력의 대가가 보장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이런데도 악성 가계빚은 가구당 평균 4천만원 대에 이르고 노력의 대가 적정성은 커녕 노력할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다. 민생문제는 경제가 좋아지지 않고는 해결될 수 없는 민생경제다. 이 정부 들어서서 개인파산자가 9배가 늘고도 잠재파산자가 넘쳐 신용사회가 위협 당한다. 민생파탄 과장론은 대통령 자신은 배부르다보니 민초는 곯는 줄 모르는 생뚱맞은 소리다. IMF 때보다 살기가 어렵다는 원성이 진동한다. 그의 말대로 물려 받았다고 해도 그렇다. 민생을 더욱 더 어렵게 심화시켜 놓고는 남의 탓만 하는 것은 정말 염치가 없다.

방송시간 60여 분 중 약 50 분을 경제분야에 할애한 것은 민생 실정(失政)을 내심 의식한 것 같긴 하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이 자칭 치적으로 밝힌 시중경기, 성장잠재력, 경제환경의 낙관론은 근거가 희박하다.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는 건 그 가운데 들 수 있는 하나의 예다. 중첩 규제로 이리저리 옥죄어 갈수록 어렵다는 말, 그래서 중국 등지로 나간단 말은 들었어도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란 말은 처음 듣는 소리다.

과대포장이다. 알맹이는 실속없으면서 겉포장만 크게 치장한 과포장인 것이다. 통치자의 어휘와 어의는 듣기 쉽고 분명해야 한다. 말 한 마디 하는데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돌려대는 건 주술과 같다. 시간 할애를 잘못해 말을 다 못한다고 했지만 그보단 말을 지나치게 굴려 시간을 낭비했다. 실제로 대통령의 연설은 말에 최면을 걸려고 드는 심령사를 연상케 했다.

양극화의 깊은 골을 만든 게 양극화를 남의 탓처럼 얘기하는 바로 이 정부다. 중산층을 붕괴시켰다. 2만달러 시대의 국가 전략과 비전이 어떻고 하지만 민중은 2만달러 시대를 실감하지 못한다. 민중이 연설의 유혹에 유혹될 수 없었던 것은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작 가려운 곳은 발등인데, 신발위만 긁는 꼴인 것이다.

대통령의 언론관은 심히 위험하다. 정부 시책이 제대로 국민에게 전달되지 않은 게 언론의 왜곡에 있다며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또 언론 탓으로 돌렸다. 정책 실패의 현실 보도를 “흔들어 무력화 시켰다”는 말 부터가 원인 관계의 선후가 바뀐 왜곡된 언론관이다. 비판적인 신문을 권력기관으로 빗대는 것도 당치 않다. 신문이 무슨 권력을 가졌다는 것인가, 다만 독자층을 가졌을 뿐이고 일반의 독자층은 신뢰의 반영임을 대통령은 성찰하여야 한다.

도대체가 신년 특별 연설 방송이 무엇 때문에 있었는지 종잡기가 어렵다. 국민에게 열 시간을 얘기하라고 하면 하고싶은 말을 다 하겠다지만 아니다. 이솝 우화(寓話)에 이런 여우 얘기가 있다. 잘 익은 포도를 따려는 데 너무 높아 아무리 뛰어 올라도 딸 수 가 없었다. 그만 포기하면서 주변에 체면치레로 한다는 말이 “저 포도는 시다”는 것이었다.

잘못된 것은 물려받은 것이고, 잘 안 된 것은 언론 탓이고, 지지도가 추락한 것은 국민이 몰라보는 탓이고, 혼자만 잘했다는 것은 내탓이라는 연설이 되어선 열 시간이 아니라 스무 시간을 해도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임 양 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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