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오월의 밤 ‘정조의 꿈’에 물들다
꿈길의 따라 간 듯한 조선으로의 여정…. 200여년 전 정조의 꿈이 경희궁에서 다시 한번 실현됐다.
경기도문화의전당이 제작한 창작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Royal Dream of the Moon)’가 5일 어둠이 내려앉은 조선시대 고궁인 경희궁을 대낮같이 환하게 밝히며 첫 고궁나들이를 성공리에 마쳤다.
경희궁 숭정전 앞 야외무대.
야외무대 앞에는 왕이 정무를 집전하던 용상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어둠이 서서히 경희궁을 감싸안을 즈음 ‘화성에서 꿈꾸다’ 테마가 흐르는 가운데 궁내에 간이의자로 설치된 1천500여 객석이 하나둘씩 메워지더니 어느새 관객들로 빼곡히 들어찼다.
무대 중앙에 마련된 객석에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비롯, 홍사종·표제순 전 도문화의전당 사장, 오인수·이건왕 도문화의전당 본부장 등이 자리를 잡았고 일반 객석에는 손을 꼭 잡고 입장한 부부와 연인들, 간간이 한국인과 함께 한 외국인들도 눈에 띄었다.
5월의 무더운 날씨를 식혀주듯 산들바람이 불어오면서 오후 7시30분 공연이 시작됐고 배우들의 움직임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막 ‘한중록 그 후’에서 어린 정조가 뒤주에 갇힌 아비를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장면을 시작으로 진한 감동이 서서히 관객들의 가슴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오후 8시가 넘어서면서 어둠이 짙어질 무렵 운치를 더해갔다.
정조가 ‘달의 노래’를 부를 때, 정조와 장덕이 러브스토리 ‘사랑의 힘으로’를 합창할 때는 객석에서 환호성과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고 정조가 장덕에게 등창 치료를 받는 장면에서는 민영기(정조)의 장난기(?) 어린 대사가 이어지자 폭소가 터져나왔다.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가 무대스케일이 큰 공연임에도 숭정전과 무대 앞을 기가 막히게 잘 활용했다.
숭정전의 용상이 무대소품으로 변하고 숭정전 내부에 조명을 설치, 무대의 운치를 더해 주었으며 빔으로 자막까지 쏘는 등 숭정전 전체가 야외무대로 변해 다른 실내공연장 못지않은 세트를 보여줬다. 야외공연의 장점을 살려 예술의전당 공연에서 사용하지 않던 장대비가 퍼붓는 장면을 연출한 ‘화성이 무너지는 장면’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대전환을 위한 암전은 자연스럽게 5월의 밤하늘이 담당했고 탁 트인 하늘과 숭정전을 배경으로 살랑거리는 바람결에 대신들의 옷깃이 자연스레 날리면서 실내무대와는 또다른 맛을 전해줬다. 야외무대인데도 황포돛배 등 웅장한 무대 소품들은 숭정전과 어우러진 조명과 멋진 조화를 이뤘다.
역시 이날 공연에서의 히어로는 민영기였다. 탄탄한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가창력까지 ‘화성에서 꿈꾸다’를 이끌어 가는 동력이 느껴졌고 정조가 마지막 부른 ‘달의 노래’에서는 뭉클한 감정이 솟구치게 하는 등 지난해 아쉽게 놓친 뮤지컬대상의 남우주연상을 보상받으려는듯 혼신의 연기를 펼쳐 객석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다만 일부 배우들의 캐스팅이 급조(?)된 듯 곳곳에서 매끄럽지 않게 진행되고 일부 배우들의 노래와 대사가 엉키는등 극의 감동을 반감시킨 것은 못내 아쉬웠다. 대표적인 게 혜경궁 홍씨역이었다. 예전 고미경씨가 맡았을 때 불렀던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유화’는 온데간데 없었고 2장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독창은 가창력은 둘째치고 노래다운 노래가 아니어서 극 전체를 망치지나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또다른 아쉬움도 있었다. 이날 객석을 찾은 많은 외국인들을 위해 영어로 된 홍보자료를 만들어 나눠줬으면 좋은 홍보가 됐을 거라는 생각과 함께 도립무용단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었던 혜경궁 홍씨 진찬례가 무대여건상 없어진 것은 아쉬움을 달래기엔 부족했다.
그러나 이같은 아쉬움도 배우들의 원숙한 연기와 코러스가 고궁의 아름다움과 어우러져 멋진 무대와 감동을 선사, 도문화의전당이 정말 멋진 뮤지컬을 하나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해 준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5월 밤하늘을 수놓은 고궁에서의 멋진 공연이 계속 이어지길 기원해 본다.
/이종현기자 major01@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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