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반 헨델 시대의 바로크 오페라는 말 그대로 '쇼'였다.
오페라 줄거리에 논리적 일관성이나 설득력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오페라 극장을 찾는 관객들은 극의 내용보다는 화려한 무대장치와 특수효과, 그리고 가수들의 현란한 성악적 기교에 열광했기 때문에, '눈과 귀를 즐겁게!'가 극장의 모토인 것이 당연했다.
13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관객들은 그런 바로크적 엔터테인먼트의 특성을 극대화한 오페라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오페라단(단장 박기현) 초청으로 이탈리아 최고의 오페라 연출가 피에르 루이지 피치가 서울에서 펼쳐 보인 헨델의 '리날도' 한국 초연이었다(협력연출 마시모 가스파론. 17일까지).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현역 거장 연출가가 이처럼 방대한 규모의 작품을 한국에 가져와서 성공적으로 작업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이미 지난해부터 관심이 집중된 공연이다.
무대장치와 의상, 소품 등 피치가 연출한 2005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프로덕션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기는 하지만, 가수들은 고프레도 역의 테너를 제외하고는 모두 이번 공연을 위해 새로 캐스팅되었고 오케스트라, 무대 전환 담당 연기자들, 스태프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국 인력이었다.
그러니 결국 외국인 연출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새롭게 팀워크를 이루어내야 했던 작품이다.
한국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헨델의 '리날도'로 과연 오페라 극장 객석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지 역시 오페라계의 큰 관심사였다.
간단히 말하면 결과는 기대를 뛰어넘는 성공이다. 물론 유료관객만으로 극장을 채운 것은 아니었지만, 첫 공연이 열린 오페라 극장에는 빈자리가 거의 없었다.
우선 연출가 피치의 명성이 중요한 역할을 했겠지만, 올해 2월 예술의 전당이 '디도와 에네아스&악테옹' 공연을 통해 정통 바로크 오페라의 예술적 즐거움을 일깨운 것도 '리날도' 공연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이 된 듯하다.
공연 내용 면에서도 허술한 부분을 찾기 어려운 완성도 높은 공연이었다.
피치의 무대는 과거와 미래를 교묘하게 혼합해 빚어낸 환상의 세계였다.
'리날도'의 소재는 이탈리아 천재시인 토르콰토 타소의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11세기 말 십자군 전쟁 이야기지만, 헨델의 오페라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18세기 영국 귀족사회의 덕목과 예법이었다.
그 두 시대의 간극을 피치는 탁월한 아이디어로 해결했다. 당대 귀족의 품위를 대변하는 리날도, 알미레나, 고프레도 등 기독교 세계에 속하는 등장인물들은 금과 은을 입힌 조각상처럼 당당하고 차갑게 빛나고, 이에 대항하는 아르간테와 아르미다 같은 이슬람 세계의 지배자들은 붉은 색을 주조로 한 '이교적' 색상으로 타오른다.
한 번도 자기 발로 걷는 일 없이 높은 단 위에 서 있거나 배나 말을 타고 이동하며 망토까지 휘날리는 주인공들은 중세 십자군 전쟁 시대를 재현한다기보다는 바로크 시대 지배계급의 과장과 허장성세를 풍자하고 있다.
회전무대를 사용하지 않고도 등장인물들이 걷지 않고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는 장치가 바로 '사람'이라는 점은 흥미로운 아이디어다.
스무 명이 넘는 검은 옷의 무대 전환 연기자가 동원되어, 주인공이 위치한 단이나 말, 배를 움직이거나 주인공의 넓은 망토 자락을 끊임없이 휘날리게 한다.
일본의 전통극 형식인 가부키의 '구로고(黑子. 관객 눈에 잘 띄지 않도록 검은 옷을 입고 배우의 시중을 드는 사람)' 혹은 분라쿠에 등장하는 검은 옷, 검은 두건의 '인형 조종자'에게서 착안한 아이디어가 아닌가 싶다.
관객에게 무대 전환과 등장인물 동선의 비밀을 모두 폭로하는 이런 아이디어는 관객이 극의 내용에 몰입하는 대신 객관적 거리를 취하게 하는 '예술적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라 스칼라 극장 프로덕션에서 그대로 옮겨온 '리날도' 무대의 틀은 피치가 그의 연출에서 애용하는 기둥 구조물로, 바로크 양식의 궁전 또는 극장을 연상시킨다.
1막의 예루살렘 성, 2막 아르미다의 성 및 알미레나가 갇힌 감옥, 3막 마법사의 동굴과 전투 장면 등이 모두 동일한 무대의 틀 안에서 펼쳐지지만, 무대 위의 스펙터클과 정교하고 인상적인 소품들 덕택에 지루함을 느낄 겨를은 없다.
특히 3막 마법사 장면의 지옥 같은 바다 풍경은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앞뒤로 무대의 깊이를 조절하면서 마치 거울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무대 전환의 테크닉은 관객에게 극장만이 줄 수 있는 매력을 실감케 했다.
내용상의 의미를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조명과 의상의 신비로운 조화와 완벽한 색채감 역시 극장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켰다.
'디도와 에네아스' 공연에서 깔끔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연주를 들려주었던 고음악 전문연주단체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은 이번 공연에서 더욱 발전한 기량으로 청중에게 기쁨을 주었다.
왼손에 지휘봉을 잡은 프랑스 출신의 지휘자 기욤 투르니에르는 강약의 대비를 최대한 살린 섬세하고 열정적인 지휘로 '카메라타 안티콰 서울'의 최선을 이끌어냈다.
리날도의 3막 아리아 '화려한 나팔소리가(Or la tromba in suon festante)'에서처럼 트럼펫이 다소 불안정한 연주를 들려주어 아쉬운 부분도 있었지만, 라멘토 아리아 '사랑하는 신부여(Cara sposa)' 또는 '새들의 정원' 부분의 서정미나 출정 장면의 활기를 제대로 살린 연주가 특히 돋보였다.
한결같이 적역인 성악가들도 청중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로시니 전문가수로 인식되어온 메조 소프라노 라우라 폴베렐리는 압도적인 콜로라투라 기교, 선명한 음색, 폭발하는 에너지와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춘 최고의 리날도임을 입증했다.
'무정한 마음이여(Cor ingrato)'와 '사랑하는 신부여(Cara sposa)'에서 보여준 그의 깊이 있는 해석은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알미레나와 함께 부른 1막 이중창의 연기는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처음부터 끝까지 관객을 자신의 가창과 연기에 완전히 몰입시키는 탁월한 가수였다.
'울게 내버려두세요(Lascia ch'io pianga)'를 불러 관객의 사랑을 받은 알미레나 역의 로베르타 칸치안은 미성과 따뜻하고 정감있는 음색을 지닌 소프라노로, 청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특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아르미다 역의 소프라노 파트리차 비치레 역시 배역의 불 같은 성격을 개성적인 가창과 연기로 적절하게 소화해냈다.
고프레도 역의 미르코 과다니니는 바로크 오페라에 어울리는 섬세하고 절제된 가창을 들려주었고, 아르간테 역을 맡은 베이스 아담 플라쉬카는 바로크 오페라 베이스 가수에게 필수적인 긴 호흡, 그리고 스물 둘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는 안정적인 가창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국내 무대에서 리골레토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바리톤 박승혁은 이번 공연에서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음색과 표현력으로 조언자인 마고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이동하는 말이나 배 위에서 노래해야 하는 가수들은 무대 위 평지에 서서 노래하는 것보다 훨씬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 분명하다. 장중하고 통일성 있는 무대를 위해 음악을 다소 희생시킨다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특히 단상에 선 가수들의 자세가 순간적으로 불안하게 흔들릴 때는 관객도 함께 불안하고 안쓰러워했다.
공연이 끝난 뒤 관객들은 연출가 피치와 함께 무대에 등장한 검은 옷의 무대 전환 연기자 모두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복잡한 무대동선을 여러 날에 걸친 연습으로 철저하게 익혀 이 화려한 공연을 가능하게 한 또 다른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습 날짜가 2, 3일만 더 주어졌더라면 이들의 움직임이 더욱 유연해져서, 단상에서 노래하는 주인공들의 가창이 더욱 안정감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조금은 남았다.
관객이 극장에서 뭔가를 배워가는 대신 마음껏 상상하고 꿈꾸고 느끼기를 바란다는 연출가 피치의 소망이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극장을 떠난 뒤에도 관객들은 너울거리는 주홍색 망토의 잔상을 오래도록 간직할 듯하다. 적어도 관객에게 바로크 오페라의 본색을 알려주고 19세기 오페라와의 차이점을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가치 있는 공연이었다.
이후로도 바로크 오페라의 매력을 계속 즐길 것인가 하는 선택은 물론 관객 각자의 몫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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