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중인도(中印度)의 아시세왕 초대를 받고 야반에 기원정사로 돌아갈 때다. 왕은 정사까지 가는 길에 만등의 촛불을 밝혔다.
가난한 한 여인이 있었다. 그도 등 하나를 봉양코자 했지만 돈이 없어 머리카락을 잘라 판 돈으로 등을 밝혔다.
이윽고 부처님이 길을 나서는 데 갑자기 일진 광풍이 불었다. 이상하게도 왕이 켠 만등의 촛불은 모두 꺼졌으나 유일하게 여인이 바친 등은 꺼지지 않았다. 여인의 등은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발길을 끝까지 밝혔다. 권세에 의한 만 등보다 신심에 의한 한 등이 더 밝았던 것이다.
아시세왕은 부처를 보았으나 마음속에 부처를 갖지 못하고, 여인은 비록 부처를 못보았지만 마음속에 부처를 가졌던 것이다. 깨달음이 곧 부처인 것이다.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엔 돼지만 보인다고 했다. 부처는 먼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초인적 외경심의 대상이 종교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종교를 가진 건, 그같은 천재적 과학자도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미지의 인간세계 영역에 대한 외경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속은 다르다. 원시적 샤머니즘의 형태로 주술이 본질이다.
이 때문에 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무속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다. 또 종교는 조건이 없는 데 비해 무속은 조건이 있다. 그러나 현대 종교인의 신앙이 어떤 종교든 다 종교적 신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영적 신앙이 아닌 기복신앙은 무속과 같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은 눈에 드러나는 그 뭣을 조건으로 내세워 돈을 소비하거나 소비케하는 행위다.
오는 24일은 음력 사월 초파일이다. 부처님 오신날을 앞두고 연등 달기가 한창이다. 절에 다는 연등이 촛불로는 화재의 위험도 있고 또 오래도록 켤 수 있는 전등으로 밝히는 것은 생활상의 변화다.
그런데 연등을 다는데도 적잖은 돈이 드는 모양이다. 돈의 액수에 따라 절에 다는 위치 또한 다른 것 같다. 부처님의 자비로 중생을 밝게 비추는 것이 연등이다. 아시세왕 같은 기복신앙이 아닌, 부처 같은 그 여인의 종교적 신앙의 연등이 누리를 밝게 비출 것이다.
/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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