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에 정년은 없다/안철호 범아핸드벨콰이어 단장

“첫사랑처럼 다가온 핸드벨 평생 동반자로 행복전해요”

지난 1950년 8월23일. 안철호 범아핸드벨콰이어 단장(82)은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이 날을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전쟁으로 가족이 모두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던 날, 아버지 안길선 목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서울신당중앙교회에 남았다 납치당해 순교했던 날이기 때문이다. 가족 중 외아들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을 부양해야했던 그의 인생 이야기는 당시 치열했던 6·25전쟁의 시절을 넘고 현재 자리에 서기까지, 이야기라기 보다는 차라리 우리 민족의 생생한 한권의 역사다.

서울대 교수로 40여년을 보낸 그는 청년시절 교회에서 처음 만났던 타악기인 핸드벨이란 연인을 다시 만나 데이트에 푹 빠져있다. “연말 수원 공연을 준비하며 또 다른 ‘청춘’을 보내고 있습니다.”

은퇴가 시작이 된 핸드벨 콰이어

지난 1991년 8월 정년 퇴직한 뒤 전공(서울대 공대)을 살려 회사를 꾸렸다. 원격탐사가 전공이었던 만큼 인공위성과 항공사진 등을 이용해 지도를 제작하기도 하고 병충해나 농작물 관련 조사를 하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다 다시 생각난 게 핸드벨이었다. 지난 1996년 12월이었다. 한정희 한국핸드벨협회장의 지휘로 범아핸드벨콰이어를 창단하고 교회와 사회복지기관, 양로원, 군부대 등지를 돌며 단원 15명과 자선공연을 시작했다. 현재까지 수도권에서 160여회 공연을 해 온 이들은 지난해 12월 수원에 정착, 연말 겨울 공연을 준비 중이다. 지난 세월 참기 힘든 고비들이 많았지만, 젊었을 적 미국에서 처음 만난 핸드벨 연주에 반해 이제 하고 싶은 악기를 연주하는 그의 말년은 행복하다.

“난 잘난 게 없어요. 다 아버지 덕이지…”

지난 1926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중학교때까지 일제의 압제교육에 시달려야했다.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 신사참배에 가족이 참석하지 않자 갖은 괴롭힘에 5번이나 중학교를 옮겨야했다. 그러다 버티기 힘들게 된 가족은 비교적 간섭이 덜한 중국 만주 용정으로 이주했다. 일제강점기 힘든 기억들을 (그는) “의로운 고생”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에서 생활은 해방 때까지 계속됐다. 고교를 졸업하던 해, 가족 생계를 돕기 위해 만주국 이임관 고시를 통과했다. 당시는 영화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중국 황제 부이가 다스리던 시기로 이임관은 일종의 중국 관리직이었다.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등이 섞여 살던 장춘에서 지내다 지난 1946년 2월 해방소식에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에 상경,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그러다 6·25전쟁이 터지고 서울에 세운 교회를 위해 아버지는 홀로 남아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며 가족을 부산으로 떠나보냈다.

피란길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폭파된 한강다리에 길이 막혀 발을 동동거리다 운좋게 남은 배 한척에 가족 모두 타고 평택을 향했다. 평소 아버지와 친분있던 평택 손 목사를 찾아가 기거하던 4일째, 그곳도 지나가던 비행기에 폭격당해 가족은 다시 천안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천안에서 대전으로 향하던 가족은 피란길 아수라장 속에 기차 탈자리가 없어 결국 화물칸 꼭대기, 기차 지붕에 올라타고 대전에 도착했다.

이런 저런 사연 속에 겨우 도착한 부산. 배고픈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을 찾던중 대뜸 미군부대 안으로 들어가 보급장을 찾았다. “어딜 가느냐”고 묻던 한 미군에게 이전 영국계통회사 아르바이트 증명서를 내밀며 일자리를 묻자, 운이 좋게도 비교적 편한 행정보좌관으로 근무하며 가족을 돌볼 수 있었다. 대부분의 피란민들이 인근 부두에서 막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허드렛 일을 하면서도 훨씬 적은 급료를 받아야했던 상황에 비하면 다행스런 일이었다.

크리스마스에 처음 만난 핸드벨

전쟁 후, 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일을 하면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게 됐지만, 당시 3천600원의 적은 월급에 가족을 이끌기는 힘겨웠다.

건설부에 들어가 연구직으로 일을 시작,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뉴멕시코주에 가게됐다. 지난 1959년 겨울,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한 뒤 핸드벨 공연을 처음 보게 됐다. 30대던 젊은이에게 이 은은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소리는 첫사랑처럼 다가왔다. 그래서 여유가 생기면 핸드벨 봉사단을 조직하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 서울대에서 40여년동안 교수로 재직했다. 재직 당시, 교관이 부족했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며 당시 생도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도 가르치기도 했다. 지난 15일 스승의 날엔 제자들이 찾아와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줬다.

/김효희기자 hhkim@kgib.co.kr

● 핸드벨(Hand Bell)

교회에서 주로 연주용으로 사용되는 핸드벨은 1600년 경부터 영국 교회에서 종탑의 용도로 시작된 전통 악기. 다양한 음계의 크고 작은 종을 연주자들이 흔들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이 핸드벨은 그동안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계속 발전해왔다. 주로 크리스마스 캐럴용 연주를 많이 했으나 요즘은 찬송가 등 어려운 연주도 할 수 있게 됐다.

◆걸어온 길

1926년 4월15일 함경북도 성진 출생/ 1943년 만주국 이임관 고시 통과/ 1948년 서울대 공대 입학/ 1991년 8월 서울대 교수 정년퇴직/ 서울대 명예교수·㈜범아 엔지니어링 회장·범아 핸드벨콰이어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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