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養兵說)과 정조24기 호국무예 율곡(이이) 선생님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라는 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그 유명한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과 정조대왕의 장영용 24기 전통무예를 생각해봤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 즉 10만명의 강력한 군대를 훈련시켜 도성에 2만명, 각 도에 1만명씩 주둔시켜 나라를 지켰다면 우리 역사의 가장 참혹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율곡사상을 선호했던 정조대왕이 호국무예 24기만 잘 육성시켜 나라를 보호했으면 36년 동안의 일제의 압박과 설움의 치욕적인 역사도, 또 동족상잔(同族相殘)의 6·25전쟁도 발발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율곡 선생은 당시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만일 전하께서 신이 (제가) 말씀드린 것들을 모두 받아들여 3년 동안만 힘써 실행하여 보시다가 그러고도 백성들이 편히 살지 못하고 나라의 살림은 그대로 부족하고 군대의 형편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때 신의 목에 비록 칼을 내리신다 하여도 신은 그것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진언했다. 그 당시 얼마나 나라의 사정이 어려웠으면 이처럼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 어린 호소를 했겠는가?
그때 율곡 선생은 나라꼴이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 않아 큰 환란이 닥칠 것이니 10만명의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 나라를 지키자는 10만 양병설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율곡 선생이 돌아가신 지 10년도 안되어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도 가장 쓰라렸던 저 임진왜란(1952~1958년)의 7년 간 치욕의 역사가 닥쳤다…. 38년이 지나 하찮게만 여겼던 오랑캐 만주족(당시 청나라)의 침입으로 끝내 항복해야만 했던 인조 14년 병자호란(1636~1637년). 청태종은 한양땅에 20만 백성을 모두 불러모으고 인조로 하여금 지금의 잠실인 삼전도에서 항복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아홉 계단을 오르며 한계단 오를 때마다 이마를 바닥에 내리쳐야 하는 고두례(叩頭禮)를 강요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 두 사건(事件)은 후대 국왕들에 엄청난 교훈과 영향을 주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해 북벌을 준비했지만 그가 재위 10년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자 북벌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효종의 뒤를 이어 북벌의 꿈을 키운 이가 바로 사도세자였다. 창덕궁 후원에서 스스로 무예를 익히고 조선의 군대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전통으로 이어졌던 검법과 창법 등 18가지 무예를 정리해 그 어린 나이에 ‘무예신보(武藝新譜)’란 무예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파의 희생으로 뒤주에서 삶을 마무리했기에 더 이상의 북벌은 조정에서 거론되지도 못하고 그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생부 사도세자의 꿈을 이루고 백성을 편안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는 선조와 인조의 치욕적인 역사 흔적을 없애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정조는 율곡 이이가 강조했던 10만 양병설을 자신의 국방정책으로 받아들였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선조가 재위하던 당시 율곡의 간청을 받아들였다면 아마도 임진왜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정조는 그동안 외세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했던 치욕적인 역사를 머릿 속에서 지우고, 가장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장용영’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장용영을 통해 사도세자가 정리한 18기 무예에 마상무예 6가지를 추가해 24가지 무예를 완성하고 이를 ‘무예도보통지’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이 무예가 바로 호국무예 24기이다.
필자가 지난 2001년 경기문화재단에 있을 때 연무대에서 정조시대 전통무예 재연을 보고 이 모습을 수원화성 관광객들에게 보여줘야겠다는 일념으로 정조시대 호국무예 24기 보존회를 만들어 발전시켜 온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면서 율곡 선생의 삶을 내다보는 지혜와 정조대왕의 개혁사상과 호국정신을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본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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