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과 겸재 정선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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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금강산을 다녀왔다. 그동안 외금강 코스에 한정됐던 금강산 탐방이 지난 6월부터 내금강 코스가 추가로 개방되면서 필자는 내친 김에 금강산을 찾았다. 금강산은 말 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산이자 천하명승이라는 유명세를 가지고 있지만, 필자는 오래 전부터 조선시대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 배경이라는 점에 관심이 컸다.

겸재는 금강산 그림을 많이 남겼다. 36세에 처음 금강산을 탐방한 이래 금강산화첩, 해악전신첩, 신묘년풍악도첩, 금강전도 등을 그렸다. 조선시대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철원 김화를 거쳐 단발령을 넘어 내금강으로 갔으므로 겸재는 단발령 고개에서 바라본 금강산을 필두로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만폭동, 보덕암,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내금강을 특히 많이 그렸다.

겸재 정선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중국의 관념산수화가 조선을 지배하던 시절, 겸재는 조선의 눈으로 조선의 풍경을 바라보고, 조선의 사상을 담아 성리학에 기초한 그림을 그렸다. 이른바 진경산수화이고 실경산수화이다. 겸재의 진경산수화가 출현하면서 한국회화사는 일대 변혁과 신기원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문화 종속이 아닌 자생적인 민족의 예술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겸재는 84세 까지 장수하면서 서울과 한강 주변을 비롯해 영남의 명승, 단양, 관동팔경, 개성의 박연폭포까지 전국의 절경명소를 거의 다 그림으로 섭렵했다.

그 중 겸재 그림의 백미는 금강산 연작이다. 특히 ‘금강전도’는 겸재 자신뿐만 아니라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자 한국미술사에 빛나는 명작으로 꼽힌다. 내금강 풍경을 그린 ‘금강전도’는 흡사 헬기를 타고 내금강 전체를 조망한 후 그린 듯 내금강 전체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아냈다.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사찰들이 세세하게 묘사가 되었음은 물론, 그림 하단의 장안사에서 상단의 비로봉까지 원형의 태극문양 속에 넣어 왼쪽에는 숲이 우거진 토산을, 오른쪽에는 서릿발 같은 암산을 대비해 음양사상까지 표현했다. 현장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대상의 절묘한 함축과 종합, 그리고 철학적 세계관을 동시에 표현한 수준 높은 회화의 경지를 이룬 것이다.

필자가 ‘금강전도’를 염두에 두고 장안사터에서 비로봉의 중간인 묘길상까지 답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계곡이든 봉우리에서든 전체가 조망되지 않는 실제의 지형에서 내금강 전체가 한 눈에 보이도록 화면을 구성한 그의 상상력이 놀라웠고, 더욱이 사진기가 없던 시절 골짜기와 봉우리의 특징을 모조리 스케치를 통해 살려낸 그의 필력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18세기 겸재의 ‘해악전신첩’에 발문을 쓴 박덕재라는 이는 겸재를 가리켜 화성(畵聖)이라 지칭했고, 오늘날에도 겸재 회화 연구에 최고로 꼽히는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도 겸재를 화성이라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내금강에는 겸재의 그림 소재가 되었던 절경과 함께 과거 문인 묵객들이 남긴 수많은 현장미술들도 남아 있었다. 그 중에서도 봉래 양사언이 만폭동 너럭바위에 휘둘러 쓴 글씨 ‘蓬萊楓嶽 元化洞天’은 굉음을 내며 쏟아지는 물소리와 어울려 살아있는 듯 했고,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며 수많은 글씨를 남긴 해강 김규진이 향로봉 경사면에 거침없이 써내려간 ‘法起菩薩 天下奇絶’도 금강산의 품격과 풍치를 더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필자는 이번 금강산 답사를 하는 동안 내내 겸재를 떠올리고 그의 예술정신을 생각했다. 오늘날 서구문화와 수입된 외래 양식의 무분별한 사조가 대세인 시대에 겸재는 무엇인가, 중화사상과 사대추종이 일반이던 시절 겸재는 어떻게 조선의 독자적인 양식을 세워 당대를 평정 했는가 등등. 겸재가 진경산수화를 이룬 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이 세계화에 이를수록 겸재의 예술과 정신은 더욱 빛나고 소중하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필자는 우거진 풀밭과 엉겅퀴 꽃이 흐드러진 장안사 터를 빠져나왔다.

이 종 구 중앙대 예술대 교수·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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