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양귀자씨 ‘원미동 사람들’ 중에서
1. 한계령 줄거리
어느날 나는 전화를 받습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목소리 주인공은 자신을 박은자라고, 어릴 적 동무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나는 찐빵집 딸이었던, ‘검은 상처의 블루스’라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불렀던 은자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은자는 부천 지역 밤업소에서 ‘미나 박’으로 꽤 유명해졌다면서 꼭 한번 자신이 노래하는 업소를 찾아오라고 신신당부를 하지요.
그 순간부터 나는 은자와 함께였던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다방 레지로 취직했던 언니와 아내와 딸들을 항상 때렸던 은자 아버지. 그리고 큰오빠가 떠오릅니다. 추억 속에서 큰오빠는 항상 꿋꿋하기가 대나무 같고 매사에 빈틈이 없어 어려웠던 사람입니다. 맛있는 음식도 큰오빠와 함께라면 다들 어려워했지요. 하지만 요새 어머니의 전화 내용의 대부분은 큰오빠가 술을 마시고 자꾸 먼산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식에 가족들은 늙어가는 모습 중 하나일 것이라고 여기려 하지만, 나는 오빠의 상심의 정체를 알 것만 같다고 고백합니다.
사는 데 바빠 아버지 추도예배를 가지 못하는 형제들. 술이 들어가면 어머니를 붙잡고 어려웠던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자는 큰오빠의 모습은 나의 마음을 계속 무겁게 합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심하게 가난했던 일곱 형제들의 생계를 오빠는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안간힘을 쓰며 살아왔습니다. 아침마다 회비, 참고서 값, 성금, 체육복 값 등을 달라고 내밀 때마다 공장에서 돈으로 찍어도 모자라것다 라면서도 큰오빠는 돈을 내밉니다.
이런 추억에 잠겨 있을 무렵, 은자가 전화를 걸어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합니다. 은자는 첫아이를 임신하고도 빚에 쫓겨 유흥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다가 유산한 자신의 고단한 삶을 들려줍니다. 나는 그 속에서 고개를 넘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창가에 붙어 앉아 귀를 모으고 있으면 지금이라도 넘어져 상처 입은 원미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또 넘어지는 실패의 되풀이 속에서도 그들은 정상을 향해 열심히 고개를 넘고 있었다. 정상의 면적은 좁디 좁아서 아무나 디딜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엄연한 현실도 그들에게는 단지 속임수로밖에 납득되지 않았다. 설령 있는 힘을 다해 기어올랐다 하더라도 결국은 내리막길을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 또한 수긍하지 않았다. 부딪치고 아등바등 연명하며 기어나가는 삶의 주인들에게는 다른 이름의 진리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다음날 고향집 동생이 전화를 걸어옵니다. 고향집을 팔기로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큰오빠가 종일토록 홀로 술을 마셨다는 거지요. 식구들 모두 조마조마하다고 동생은 전합니다. 큰오빠의 뒷바라지 속에서 자란 여섯 남매는 의사로, 고급공무원으로, 작가로, 음악선생으로 번듯하게 자랐지만, 지금은 자신들의 일상 속에서 바삐 살아갑니다. 큰오빠는 한때 동생들에 대한 부양의 책임으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지금 노쇠해가는 삶의 깊은 구멍은 큰 오빠를 무너지게 하지요. 몇 년 전 대수술을 받은 후 기다리는 것은 허망함 뿐이라는 큰오빠의 낙심이 무엇일지 나는 떠올려 봅니다.
나는 결국 은자의 무대를 찾아가기로 합니다. 한 여인이 무대에 올라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이란 노래 ‘한계령’을 부릅니다. 나는 그 속에서 오빠의 지친 뒷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나는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은자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돌아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잿빛 하늘 아래 황량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꿈을 꿉니다. 그 속에서 나는 형제들도 봅니다. 큰오빠는 앞장을 섰고, 다른 남매들이 뒤를 따르는 꿈입니다. 며칠 후 은자는 전화를 걸어 내가 오지 않았음을 아쉬워합니다. 그리고 곧 자신이 창업할 가게 이름이 “좋은 나라”라면서 한번 찾아오라고 권하죠. 나는 그 가게 이름이 참 좋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좋은 나라에 갈 수 있을지, 아니 좋은 나라에 가서 만날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 왜 나는 은자를 만나지 않나요?
원미동은 물질만능과 극도의 개인주의 속에서 서로 소외되고 고독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 속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나’ 또한 이 법칙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던 나에게 걸려온 은자의 전화는 예전 궁핍한 시절의 어린 추억을 떠올려주는 매개체가 됩니다. 그때 생계를 책임졌던 무섭고 어렵기만 하던 큰오빠는 현재 허무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월의 양극단에서 지은이는 ‘한계령’이란 노래 속에서 형제들의 모습을 발견하죠.
나에게 고향은 현재를 살기 위해 그저 그렇게 버티는 편안한 일상과 달리 고단하지만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칩니다. 꿈이 있었고, 그 꿈들을 이루기 위해 치열했던 공간이지요. 은자 역시 고생스럽게 살아왔지만 가수라는 꿈은 이루지 못하고 그저 유흥업소 가수로 만족하면서 가게를 차리는데 만족해하잖아요. 결국 고향의 추억과 꿈은 은자를 만남으로써 그 모든 것은 이미 퇴색되어 버립니다. 고향의 옛 추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은자를 만나지 않는 것이지요.
▷ 왜 제목이 한계령인가요?
은자의 노래를 듣고 꾼 꿈속에서 큰오빠를 선두로 해서 모든 남매가 저마다의 큰 짐을 지고 걸어가는 것을 봅니다. 이제는 번듯하게 자라서 큰오빠의 근심이 되지는 않지만, 그들도 자신들의 삶에 막혀 아버지의 추도예배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나’의 처지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은자에게 한번 가려고 해도 남편이 두 아이를 봐야지 가능한 처지이지요. 힘겹게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삶의 무게로 자유롭지 못한 80년대 소시민들의 모습을 한계령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특히 큰 고개를 넘었으나, 이제 왜 내려가야 하는지도 모른채 우두망찰한 큰오빠를 가장 직접적으로 비유했다고 볼 수 있지요.
▷ 왜 나는 은자의 이야기에서 오빠를 떠올리나요?
은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마자 나는 찐빵집 은자를 떠올립니다. 그와 동시에 항상 가장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큰오빠도 동시에 떠오르죠. 큰오빠는 자식과 동생들을 다 키워놓고 그리고 집까지 판 후 진이 다 빠진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큰 수술 후 쇠약해진 몸은 다 커서 이제는 아버지 추도예배에 전원 다 참석시키기 어려운 동생처럼 허망합니다. 술을 마시면 예전의 추억을 떠올리자며 어머니를 붙잡고 우는 큰오빠.
나는 은자의 가게에서 한계령의 노래를 들으면서 오빠를 곧장 연상하죠. 결국 은자는 나에게 큰오빠가 있는 고향을 떠올리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지요. 그리고 그곳은 큰오빠 혼자서 모든 가족의 생계와 미래를 짊어졌던 공간이기도 하고요. 동생들 때문에, 살기 위해서 6,70년대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등바등 살아왔던 큰오빠는 이제 ‘자신의 존재’가 하나둘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허탈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은자의 가게에서 한계령이란 노래를 들으면서 오빠를 떠올리는 것도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 안착하지 못하고 유랑하는 오빠의 현재의 모습을 알기 때문이죠. 결국, 이농한 시골 사람들이 도시에 적응하지 못한 채, 어떤 형태로 유랑하고 있는가를 다룬 작품으로 경제적 발전을 이룩했지만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하는 성실했던 소시민들에게 그들의 삶은 통과해 온 지난 추억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 왜 ‘나’는 은자의 가게 좋은 나라에 가는 것이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나요?
은자는 곧 열게 될 자신의 카페 ‘좋은 나라’로 작가를 오라고 합니다. 나는 참 좋은 이름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좋은 나라로 갈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고 말하죠. 여기서 은자의 가게 이름은 중의적으로 곧장 “좋은 나라”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제 안정을 찾아가지만 고생스러웠던 시절을 겪었던 은자. 그리고 가장으로 책임졌던 큰오빠의 고생은 모두 훗날 “좋은 곳”에서 살게 될 거라는 희망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힘겨운 삶의 희망이었을지 모르지요. 고단한 삶을 버티어 내도록 우리가, 누군가가 제시한 희망의 봉우리는 아닐지. 그래서 한계령이란 노래처럼 저산은 내려가라 내려가라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지요. 힘겹게 올라왔으나 결국 다시 내려가야 하는 인생처럼 “왜 사니?”라는 물음에 “좋은 곳에서 살려고.”라는 대답은 그저 현실이 아닌 추억으로 가능할 뿐입니다.
/조주희 (대광고등학교 국어 교사)
▲빅터 플랭클 박사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이 유태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았을 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미”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죠. 그는 로고테라피라는 학문을 만듭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도대체 사는 것이 무엇인지는 심리학자 뿐만 아니라 소설가들에게도 중요한 화두가 됩니다.
80년대 <나는 소망한다 내가 금지된 것을> 이란 작품으로 유명한 양귀자 작가는 ‘소설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질문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 이에요. <원미동 사람들> 은 11편의 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미동> 원미동> 나는>
원미동은 한자를 풀면 “멀고도 아름다운 동네”가 되지요. 80년대 가정의 모습을 담아낸 이 작품은 가장 평범한 우리네 삶을 담고 있습니다. 80년대 하면 떠오르는 건, 민주화 열풍과 함께 이기주의가 급속도로 펴졌던 우리네의 밋밋한 일상입니다. 그 속에서 양귀자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왜 사는지 묻고, 이웃의 폭력에 눈 돌리는,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는 원미동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오늘 다룰 작품은 바로 <원미동 사람들> 이라는 연작 소설의 맨 마지막을 장식한 <한계령> 입니다. 한계령> 원미동>
▷교사 주도의 논술수업 한계…문제 만들고 제시문 편집 즐겨야
논술 수험생들은 대부분 논술 문제집을 가지고 공부를 한다. 논술 문제집은 논술 전문가가 만들었기에 학생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문제를 푸는 것뿐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학생들은 논술 시험 출제 의도조차 잘 파악할 수 없다. 논술이 어렵다는 인식만 가중될 뿐이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스스로 논술을 즐겨야 한다. 그 대안으로 스스로 문제를 만들고 제시문을 편집하는 ‘스스로 논술학습법’을 제시한다. 다음의 <경기일보> 기사를 보자. 경기일보>
위의 기사 제목은 각 분야별로 선정한 것이다. 우선 학생 스스로 신문의 각 분야별로 6편 정도 선정한다. 이어서 선정한 제시문 중에서 또 제시문을 마음대로 골라 이를 바탕으로 문제를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런 과정 중에서 관련 없는 제시문은 뺄 수도 있다. 이른 바 학생 마음대로 제시문을 편집하고 문제를 만드는 것이다.
가령 위의 ‘⑴,⑵에서 문제점을 찾아 제시하고 ⑶의 관점을 참고하여 해결방안을 제시하시오’란 문제를 만들 수도 있다. 즉, ⑴의 내용 중에 ‘경기, 서울 등 수도권의 아파트 값이 비수도권에 비해 3배나 높다’를 통해 문제점을 생각해낼 수 있다. 또한 ⑵의 ‘급식위생 관리를 부실한 운영’에서 문제점을 잡아낼 수 있다. 그 해결방안으로 ⑶의 ‘주민의 직접 참여를 통한 아파트 값 조정 기구 설치’, ‘보육시설 급식 운영의 주민 적극 참여’ 등을 제시할 수도 있다. 또한 ‘⑹에서 문제점을 ⑷의 관점으로 비판하시오’라고 문제를 만들 수도 있다. 이 경우 전통을 중시하는 ⑷의 입장에서 이기주의 앞에 당을 바꾸는 ⑹의 내용을 비판할 수도 있다.
각 신문 기사의 요약과 공통점과 차이점 파악은 기본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시문간의 연관 관계를 파악해 나름대로 문제를 만들면 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든 문제에 대한 500~1000자 정도의 답안을 작성하여 학교의 논술교사에게 첨삭을 받아보는 것이다. 말 그대로 논술의 전 과정을 학생 스스로 해보는 것으로 ‘논술 즐기기의 극치’를 느낄 것이다.
학생들은 스스로 만든 논술 문제와 편집된 제시문에 대하여 애정을 느낀다. 자신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자부심 또한 느낀다. 이런 심리적 요인이 더해져 나만의 논술 즐기기는 끝없는 상승 곡선을 그릴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는 논술 교사가 일방적으로 수업을 이끌어왔다. 창의성이 중시되는 논술 시험에서 교사 주도 논술 수업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이제 논술 수험생들은 신문의 기사를 가지고 이런 저런 논술 문제를 마음대로 만들어보자. 학생들의 ‘스스로 논술학습법’을 통한 노력은 고득점 논술 답안을 예약할 것이다.
/이도희(송탄여고 교사 한국언론재단 NIE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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