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박근혜의 불과 1.5% 포인트 표차 패배, 이명박이 이긴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 경선은 그야말로 박빙의 승부였다. 박근혜의 패인은 뭣이었을까?

박근혜가 15대 총선으로 정계에 입문할 당시, 많은 사람들은 선친의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 나올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선거구로 선택했다. 자력 진출을 보이기 위해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은 것이다. 그리고는 내리 3선 의원이 됐다.

재선 의원으로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대표가 됐을 땐 탄핵 역풍으로 당의 지지율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분연히 천막당사를 결행, 출퇴근을 택시로 하면서 민심에 부단히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2004년 4월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은 121석을 일궈 야당으로서의 강력한 기반을 회복했다.

지난해 5·31 지방선거 유세 땐 지금도 얼굴에 자국이 남아 있는 면도날 테러를 당했다. 쏟아지는 피를 자신이 손수건으로 막은 채 걸어서 입원하고는 퇴원하자마자 격전지였던 대전시장 선거 유세에 돌입했다. 지방선거를 한나라당 완승으로 이끌었다.

이번 경선은 말 그대로 ‘지독한 경선’이었다. 그 결과가 나온 전당대회에서 이미 패배를 감지하고 단상에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박근혜는 공식발표후 가진 인사말에서 또박또박한 말씨로 패배승복, 백의종군을 선언했다. 당원들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낼 때, 캠프 요원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경선에 함께 나섰던 원희룡 예비후보는 “대인 같은 큰 사람의 모습에 진심으로 존경과 위로를 보낸다”고 말했다.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5·16이 성공하고나서 그가 누구인 가를 알기 위한 가족 사진이 언론에 공개됐었다. 서울 신당동 집마당에서 어머니 육영수와 함께 찍은 삼남매의 맏이인 근혜의 앙증스런 초등학생 모습을 기억하는, 지금의 나이든 이들은 오늘의 정치인 박근혜를 보면서 금석지감을 가질 것이다. 그 어린 소녀가 ‘담대하다’ ‘큰 정치인’이라는 평가속에 정치발전을 한발짝 앞당긴 야당 지도자로 성장한 것이다.

박근혜는 경선에서, 특히 여론조사에서 왜 석패했을까? 여러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지만 여성이라는 사실이 핸디캡 아닌 핸디캡으로 보는 관측이 유력하다. 남성 중심의 한국사회가 정치인 박근혜의 꿈을 좌절시킨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역시 위대했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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