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100% 사후보증…. 절대 도망 안감.” 이처럼 천박한 직설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들이 언제부터인가 거리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베트남을 ‘처녀수출국’으로 인식하는 우리 안의 그릇된 관념은 좀처럼 해소될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신붓감을 골라잡는 식의 국제결혼의 매매(賣買) 관행은 여전하고, 한국에 온 국제결혼 여성들을 위한 다문화정책은 채 수립되지 않았다. 이때문에 30년만에 재개된 베트남과 한국과의 우정에 금이 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대책은 없을까. 베트남의 대표적인 지식 그룹인 베트남작가동맹(서기장 휴띤·시인) 회의실에서 국제결혼 문제에 관한 베트남 사회의 내밀한 반응을 ‘육성(肉聲)의 언어’로 들어보았다. 좌담에는 다오 킴호아 베트남작가동맹 국제교류위원장(시인), 프헝 리 하노이대 한국어과 학생, 고영직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허행윤 경기일보 문화부장 등이 참석했다.
▲고영직: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국제결혼이 부쩍 늘었다. 한국인 100명 중 13명이 외국인과 결혼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는 비율이 매우 높다. 국제결혼에 대한 베트남 사회의 입장은 어떤가?
▲다오 킴호아:베트남이 개혁·개방을 뜻하는 도이모이정책을 표방한 지 20년이 지났다. 교전 상대국인 미국과 이미 국교를 맺었고 지난해는 WTO(세계무역기구)에도 가입했다. 이런 사실들을 말하지 않더라도 베트남은 국제결혼 자체를 법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지 않은가?(웃음)
▲허행윤:전적으로 공감한다. 누가 사랑을 법으로 막을 수 있겠나. 문제는 베트남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는 국제결혼 중개업체들의 천박한 상혼(商魂) 때문이 아닌가? 자신을 배우자로 선택하는 남성의 국적, 나이, 직업 등도 모르고 진행되는 결혼중개 시스템에서 온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오 킴호아:서로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중요한 게 아닐까? 이 점은 두 나라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한국의 문화와 문학을 존중하고 사랑한다. 베트남 TV에 비친 한국 드라마를 보면 우리 문화와 닮은 점이 무척 많다.
▲프헝 리:고향 친구 중 한국 농촌총각과 결혼한 친구가 있다. 그녀의 결혼 생활이 썩 행복해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규모에 걸맞게 타인들과 더불어 사는 다문화사회의 윤리학과 정책 등을 시급히 정립해야 한다. 지난해 한국의 어느 신문이 우리나라를 ‘처녀수출국’으로 묘사했다. 그 기사를 보고 베트남 여성으로서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꼈다. 베트남 여성은 2등 국민이 아니다.
▲고영직:유구무언(有口無言)이다. 지난해 5월 서울 대학로에서 베트남 유학생들과 국제결혼 여성들이 모여 항의집회를 열었다. 나 또한 그때 집회에 참석해 울분에 찬 베트남 여성들의 목소리를 생생히 들었다. 베트남 사회가 한국인 혐오감정을 가질만 했다고 본다.
▲허행윤: 한국 언론인의 한사람으로서 각별한 책임감을 느낀다. 리 양이 말했듯이, 한국 사회가 더 높은 공생의 윤리학을 구현하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헝 리:한국 드라마들은 베트남에 소개되지만, 베트남 드라마들이 한국에 방영되지는 않는다. 한국어과 학생으로서 베트남 문학작품들이 한국에 더 많이 소개됐으면 좋겠다. 일방적인 문화 교류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지 않은가? 한국의 농촌 생활을 다룬 드라마들이 베트남에 소개된다면 더 좋을 것이다.
▲허행윤:10년 전 한국 내에서도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캠페인이 펼쳐졌었다. 당시도 도회지 처녀들이 막연하게 시골로 시집간다는 개념이 지배적이어서 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 등을 겪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많은 도시의 직장인들이 귀농하고 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많은 젊은 여성들도 시골하면 막연히 힘든 농사만 짓고 허드렛일에 시달리는 곳으로만 인식하지 않고 보다 진취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다시 말해 농촌 총각과의 단순한 결합이 아닌 진정한 사랑으로 상대를 신뢰하며 시골에서의 보람찬 프로젝트를 세워 건강하게 살겠다는 견해들이 그것이다. 한국의 농촌 총각들과 결혼하려는 베트남 여성들도 농촌은 막연히 힘든 곳이라는 부정적인 선입관을 불식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곳에서 자신에게 맞는 희망에 찬 계획을 세우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다오 킴호아:문학작품 교류에서도 일종의 ‘문화역조’ 현상이 있다. 베트남 정부는 미국을 비롯한 교전 상대국들에게 일체의 전후 피해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는 교전 상대국 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원활동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환영한다.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을 비롯한 한국 내 문화 NGO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고영직:전적으로 공감한다. 언젠가 “물러난 적에게는 복수하지 않는다”고 한 베트남 속담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두 나라 모두 생명을 아끼고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것 같다. ‘호생지덕(好生之德)’의 미덕을 공유한 셈이랄까.
▲프헝 리:한국과 한국 사람들이 좋아 한국어과에 진학했다. 베트남 여성들을 골라잡는 식의 국제결혼 중개 시스템은 바뀌어야 마땅하다. 우리나라 여성들의 인권을 묵살하고 모독하는 국제결혼 관행이 계속된다면 두 나라의 관계는 어쩌면 ‘지속 불가능한 관계’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모두 소중한 ‘인간’이지 않은가?
▲허행윤:같은 생각이다. 베트남과 한국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도 끗끗하게 민족을 지켜 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세계는 이미 글로벌사회에 진입했다. 베트남 사람이면 어떻고, 한국 사람이면 또 어떤가. 특히 결혼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해당 당사자들에게는 중대한 가족사(家族事)이다. 이처럼 중차대한 인연을 통해 한가족, 더 나아가 한나라와의 관계가 맺어진다는 의미에서 베트남 여성과 한국 남성과의 국제결혼은 이제 다시 정립돼야 한다.
▲고영직:두분 말씀 잘 들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적(國籍)과 우리 ‘민족문화’의 저력을 강조하는 자민족 중심주의에 중독된 한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약자의 희생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는 점을 한국인들 스스로 행동으로 입증해야 할 과제가 남은 것 같다.
특별취재반: 허행윤 문화부장 heohy@kgib.co.kr 전형민 사진부장 hmjeon@kgib.co.kr 고영직 경기문화재단 전문위원 gohyj@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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