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중국 본토에 고구려를 세운 이정기 장군

대륙에 ‘또다른 고구려’세워 唐과 겨루다

668년 동아시아 대 제국 고구려는 망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뒤 고구려인에 의해 부활해 중국대륙의 한복판에서 강력한 국가를 건립한 뒤 반세기 동안 군림했던 사실을 우리는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당연합군의 총공세와 고구려 내부 분열 등으로 만주벌판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기상은 사라졌다.

그러나 고구려의 후예인 유민들의 마음마저 송두리째 앗아간 것은 아니다.

고구려 패망 이후 대중상과 대조영 장군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 국통을 계승해 대진국을 세웠고 나아가 해동성국 발해로 성장했다.

발해가 옛 고구려 영토를 배경으로 성장했다면, 고구려 유민 이정기 장군은 당나라 본토에 강력한 국가를 세워 반세기 동안 운영했다. 이정기 장군을 시작으로 이납·이사고·이사도 장군 등 4대에 걸쳐 765년부터 819년까지 55년 동안 산동반도를 장악, 최대 15주에 이르는 영토를 차지했다.

당나라로 끌려간 20만명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의 부활을 꿈꿨을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과 갖은 박해는 그들을 더욱 단결시켰는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망한지 100년이 지나 이정기 왕국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낙양 등을 위협하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것도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등을 앞세워 중국 본토에 최초로 설립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정기 장군의 성장

732년 고구려 유민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무장으로 요동지역을 관할하던 평로절도사 산하 비장으로 근무했다. 서기 755년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켜 화북지역을 장악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요동지역 군사들을 규합한다. 이어 서기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자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요동지역을 장악했다.

이후 761년 2만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중국 산동성 청주에 입성, 당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하고 10주를 장악했다. 이를 계기로 777년 조주와 서주 등 5주를 합쳐 15주를 차지, 130만여호에 800만명을 거느렸다.

그의 혁혁한 전공 중 하나는 장안으로 통하는 남북대운하의 길목을 점령한 점이다. 운하를 통해 소금과 생선, 쌀 등 강남의 풍부한 물자의 소통이 막히자 당나라 조정은 그의 존재를 인정, 평로치청절도관찰사와 신라·발해와의 해상운수 총책임자 등의 관직을 하사했다.

◇이정기 장군 그 이후

10만 대군으로 장안 총공세를 앞둔 이정기 장군은 49세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이후 그의 아들 이납 장군은 ‘제(薺)’란 국호를 선포하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시작했고 당나라 관리가 대거 제나라 관리가 되겠다고 투항하기도 했다.

그러나 41세로 단명한 이납 장군에 이어 이사고 장군이 왕에 등극했으며, 그 뒤 이사고 장군의 이복 동생 이사도 장군이 뒤를 이었다. 이사도 장군은 이납 장군이 중국인 후처에게 얻은 아들로서 그의 아내도 중국 여인 위씨였다. 이것이 화근이 돼 중국인 관리들이 제나라 요직을 차지하면서 제국은 기강이 쇠퇴하면서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망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백제가 겪었던 역사의 아픔을 또다시 겪은 것이다.

이사도 장군이 등극하던 시기, 장안에선 당나라 중흥의 영주로 일컬어지는 헌종이 즉위했다. 헌종은 이정기 장군으로부터 시작한 제나라와 장보고 해상왕국 등을 차례로 토벌했다. 이에 앞서 814년 헌종이 회서를 치자 이사도 장군은 이듬해 강회에 군량미가 쌓여 있던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을 불살라버리고 교량들을 파괴하는 등 당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이어 장안까지 자객을 보내 당시 번진 토벌론을 주창했던 재상 무원형을 암살하는 등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하는 전술을 적극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헌종은 타협론을 단호하게 배격했다.

당시 조정의 토벌군 선봉은 신라인 장보고 장군이 군중소장으로 속해 있던 무령군이었다. 816년 치청의 평음까지 무령군의 선봉장 왕지흥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819년에는 선무·위박·의성·무령군 등의 협공을 받던 이사도 장군은 같은해 주력군인 위박의 전홍정에게 운주와 동아에서 잇따라 패하고, 군사 8만명을 잃었다.

한때 제나라와 동맹관계였던 군벌들까지도 당연합군에 참가했다. 이사도 장군의 수하로 도지병마사였던 유오는 정세가 불리하게 되자 운주성에서 이사도 장군을 죽이고 당에 투항해버림에 따라 819년 당의 심장부에서 55년을 유지해왔던 이씨 일가의 제국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이정기 장군

‘신당서 열전’에 나타난 이정기 장군은 아주 공평하고 빈틈이 없는 정책으로 자기 영토를 다스렸는데, 그가 관할하는 지역 관리들은 그가 무서워 감히 말을 못했다고 한다. 그런 반면 군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자기네들의 지도자로 추대했다고 밝히고 있다.

‘산동성 청주시지’에 따르면 “이정기 장군은 고구려인으로 본명은 이회옥이다. 바다를 건너 청주로 왔다. 강한 병사 10만명이 당나라 동쪽을 차지하고 있어 주위의 번진들이 몹시 두려워했다. 당나라를 인정했지만, 당나라의 법령을 사용하지 않았다. 관작과 군대, 세금, 형벌 등을 독자적으로 집행했다”고 기록했다.

외모에 관한 기록은 대체로 신체가 건장하고 담대한 용력을 갖췄다고 쓰여 있다. ‘신당서’는 “안록산 난 당시 반군 토벌에 동원됐던 위글(군의 대장)이 자신의 전공과 완력을 앞세워 포악하게 날뛰어 다른 절도사들까지도 그를 제어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이를 보다 못한 이정기 장군이 그를 격투 끝에 제압하자 군사들이 이정기 장군을 추종하게 됐다”고 기록했다.

민족사에서 그들에 대한 언급은 고작 일제 통치 때 육당 최남선이 쓴 ‘조선역사’에서 나타날 뿐이다. 오히려 중국사서인 ‘신당서’, ‘구당서’, ‘자치통감’에 그의 전기(傳記)가 실려 있다.

/이형복기자 bok@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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