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없는 ‘아우성’

정치권은 온통 총선 아우성으로 소리가 요란하다. 그러나 소리없는 아우성이 있다. 국회의원 선거따윈 거의 안중에 없다. 먹고 살 걱정이 태산같기 때문이다. 영세민·서민·소시민 등 민중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하늘을 찌른다. 드높은 원성이 허공에 흩날린다.

벌기는 힘들고 쓰기는 헤프다. 만원짜리 석장을 손에 거머쥐려면 등골이 휜다. 한데, 만원짜리 석장을 들고 시장에 나가면 금방 눈 녹듯이 사라진다. ‘장바구니 물가’를 잡는다지만, 굳이 바구니를 들고 갈 것도 없다. 바구니를 채울 돈이 없다. 그냥 꽁치 같은 것 등을 사담은 비닐봉지 서너 개쯤 양손에 달랑 들면 고작이다. 학원비다, 교통비다, 뭐다 해서 날마다 ‘쩐(錢)과의 전쟁’인 것이 민중의 일상이다. 돈은 흔하다는 데, 그 놈의 돈이 다 어디로 갔는 지 민중들에겐 이토록 귀하다. 유동성의 왜곡이다.

‘경제 쓰나미’가 바다 저 너머에서 파고의 혀를 날름거리며 밀려온다. 제발 잘못 본 생각이길 바라지만, 아무래도 잘못 본 건 아닌 것 같다. 원유·곡물·철강석 등 각종 원자재 값이 1년만에 50%나 폭등했다. 변변한 부존자원 하나 없다. 수출로 먹고 사는 형편에 생산을 멈춘 대기업 공장이 속출한다. 중소기업·대기업 간의 납품가 갈등이 심화한다. 양돈 농가는 사료값은 뛰고 돼지값은 떨어져 마리당 5만4천원의 손해를 본다며 정부가 수매해달라고 매달린다. 이는 예를 든 사례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부는 경제를 살린다고 했다. 장담했다. 그러나 믿기지 않는다. 무슨 수로 살린단 말인가, 기업규제를 풀어 경제를 살리는 것은 잘 돌아갈 때 얘기다. 잘 안 돌아가도 풀긴 풀어야지만, 채산성 악화는 투자를 위축시킨다. 대통령 선거 땐 7% 성장률을 말해놓고, 당선되고 나서는 6%로 낮춰 잡은 것은 능히 이해한다. 하지만 6%도 어렵다. 잘해야 4.6%에서 4.8%로 보는 것이 민간 연구단체의 통설이다.

나라빚은 300조원에 육박, 연간 이자만도 13조원 가량이다. 국방예산의 절반에 해당된다. 재정이 위협받는 지경이다. 가계빚은 600조원에 육박한다. 주택 담보대출이 많다. 서브프라임은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가계빚발 금융대란의 위기에 처했다. 금융대란은 국가신인도에 치명상을 가져온다.

대통령은 전 정권이 고유가 대책을 세우지 않은 건 ‘죄악’이라고 했다. ‘죄악’인 것은 맞다. 유가는 이미 100달러 선을 넘어 110달러 대에 진입했다. 30달러 대였던 게 불과 5~6년 전인데, 이토록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문젠 이에 그치지 않는 데 있다. 전문가들은 조만간 200달러 선을 전망한다. 스웨덴은 바이오 에너지 등으로 대체, 15년내 석유사용을 중단하는 탈석유화를 선언해 놓고 있다. 전 정권의 유가 무대책을 질타했으면, 그럼 현 정권의 유가 대책은 뭣인가를 묻는다.

물론 아직은 대책이 나올 수 없음을 안다. 그러나 할 말은 있다. 앞으로 아무리 뾰족한 수를 내놓는다 해도 절약보다 더한 왕도는 있을 수 없다. 비싸고 귀하면 아끼고 덜 쓰는 것이 상지상책이다. 경제가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수입이 적으면 지출도 줄여야 한다. 경제가 어려운 데 쓸 것 다 써가며 경제를 살리는 묘수는 없다.

1930년대 대공황을 맞은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제일 먼저 자신을 포함한 공무원 봉급을 23% 대폭 삭감했다. 심지어 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들의 연금도 15% 줄였다. 이를 법으로 만들어 시행했다. 아울러 정부 지출을 극소화 하므로써 국민과 고통을 함께하는 의지를 보였다.

물론 지금은 자유주의 경제를 수정,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이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서로 팔고 사는 소비자 사회가 연대한 근검절약은 요구된다.

예컨대 정부가 서민생활 안정대책으로 정한 52개 생필품 가격 관리는 단기처방일 뿐 원인처방은 못된다. 물가의 상승관계를 행정력으로 억제하는 덴 한계가 있다. 서비스 요금은 관허요금 시대가 아니다. 관리대상 품목의 장기적 관세 면제는 역기능을 낳는다. 지방자치단체의 상수도 사용료, 쓰레기 봉투값 등 인상 억제는 값 상승 요인을 재정으로 충당, 결국은 주민 세부담으로 보전된다. ‘조삼모사’인 것이다.

집집마다 전등 한 개를 덜 켜면 연간 수백억원, 승용차 10부제를 이행하면 연간 1조8천억원이 절감된다고 한다. 이런데도 전혀 이행이 안 되고 있다. 나 혼자 한들 무슨 효과가 있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근검절약을 국민적 공동체사회 의식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없어 항상 구호에 그친다. 구심점은 국민사회를 감동시킬 만한 정부의 솔선 수범이다.

대통령은 이 점에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마잉주 대만 총통 당선자 부인이 여느 때처럼 청바지 차림에 버스를 타고 직장에 출근하는 외신 보도가 눈길을 끈다. 꼭 이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징성은 필요하다. 경제를 살리는 것은 범국민적 에너지 절감에서 시작되는 데, 이를 점화할 상층 구조의 모랄이 빈곤하다. 소리없는 민중의 아우성을 들을 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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