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 100년’? 제목달기에 신중을

이영미 대중예술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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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한국연극 100년’이란다. 한국연극협회를 중심으로 기념사업단이 꾸려졌고, 여러 가지 행사들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연극평론을 하고 연극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해를 맞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목을 읽는데 덜커덕 뭔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한국연극 100년’이라, 도대체 왜 하필 올해가 100년일까?

이 판단은 1908년 원각사에서 이인직이 ‘은세계’를 공연한 것을 기점으로 계산을 한 것이다. ‘은세계’는 이인직과 판소리 소리꾼들이 함께 만든 본격적인 창작창극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이전까지의 창극이 ‘춘향가’ 등 이미 존재하는 판소리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라면, 이 작품은 인물과 사건을 완전히 새로 창작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은세계’가 과연 ‘한국연극’의 시작인가 하는 점이다. 그럼 우리나라에서 그 이전에는 ‘연극’이라 불릴 공연물이 없다는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1960년대였다면 이런 판단에 수긍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인간사회에서 연극이란 것이 없을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일뿐더러, 제의(祭儀)로부터 독립된 형태의 연극이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기록은 매우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승되어 내려오는 가면극(봉산탈춤, 양주별산대, 고성오광대 등)과 인형극 ‘꼭두각시놀음’ 같은 것이 있고, 이는 1908년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올해를 ‘한국연극 100년’이라는 말로 기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구태여 올해를 기념하자고 하면 ‘한국 신연극 100년’ 혹은 ‘한국 근대극 100년’ 쯤으로 제목을 붙이는 것이 옳다.

물론 이 역시 학술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신연극’이라는 표현은 ‘은세계’에서부터 처음 나타나니 별 문제가 없을 수 있지만 아직까지 이 용어가 쓰이지 않으니 그것이 껄끄럽다. ‘근대극’이라는 표현도 그러하다. 조선 후기로 근대의 기점을 올려 잡으면, 근대의식이 두드러진 민속극들을 처리하는 문제가 골치 아파진다. 한 걸음 물러나 근대적 ‘의식’이 아닌 근대적인 새로운 ‘연극형태’의 출현에 초점을 맞춘다고 할 때에도, 이미 1907년 경부터 원각사에서 판소리를 개량해 창극으로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었으니 그때부터 보아야 마땅하다. 이 창극이야말로 이전부터 전승된 ‘전통연희’가 아니라 분명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연극 100년’의 사업을 주도하는 사람들도, 전근대시대의 연극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연극 100년’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근대연극 100년을 의미하는 것임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왜 제목을 이렇게 부정확하게 붙였을까?

혹시 그저 머릿속으로는 한국연극의 유구한 전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마음과 몸이 그것을 잘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창극인을 연극인으로 생각해오지 않았고 일본 신파극이나 서구 근대극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새로운 경향을 연극의 중심으로 인정해 온 터이니, 그저 ‘한국 근대극 100년’이나 ‘한국연극 100년’이나 그리 별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사소한 실수였다고 말하기는 좀 크고 심대한 실수인 셈이다.

그나마 올해의 기념사업의 첫 작품이, 남사당패의 이야기를 담은 극단 미추의 ‘남사당의 하늘’이라는 점이, 이러한 실수를 다소 무마할 수 있는 선택이었을 수 있다. 제목은 잘못 붙였을지언정, 그래도 우리에게 유구한 연극의 역사가 존재했음을 인정하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영미 대중예술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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