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BC 552~479)는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이다. 지금의 산둥성이 노 나라 땅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빈곤속에 학문에 뜻을 두어 유가(儒家)의 비조를 이루었다. 그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은 어린 조카인 주(周)나라 성왕(成王)을 도와 태평성세를 이룩한 주공(周公)이다.
공자는 오늘날 학문으로 높이 숭앙받고 있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다. 노나라 관직에 몸을 담아 조정 대신의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과의 의견 충돌로 음해를 받았다.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공자의 이상적인 도덕정치는 당시 세속에 물든 기성세력으로부터 배척됐다. 요즘 말로 하면 개혁세력의 공자는 수구세력의 정적이었던 것이다.
노 나라 조정에서 물러난 공자는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도덕정치를 펼칠 여러 나라의 임금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더러는 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정(鄭) 나라에 갔을 땐 마침내 일행이던 제자들마저 다 떨어져 나가고 자공(子貢)만이 남았다. 그런데 자공이 스승인 공자를 길에서 잃고 말았다. 공자를 찾아 헤매던 자공은 길가는 사람에게 이렇게 이렇게 생긴 사람이 내 스승인데 못 봤느냐고 묻자 대답이 걸작이었다.
“동문쪽에 계신 분이 아마 당신이 찾고 있는 분 같은데, 이마는 요 임금을 닮았지만 몰골은 뜻을 얻지 못한 것 같은 게 초상집 개처럼 초라해 보이더라”고 했다. 자공이 이윽고 스승을 찾고 나서 행인의 말을 들려주었더니 공자는 “용모는 맞지 않으나 초상집 개처럼 초라하단 것은 맞다”면서 껄껄 웃었다.(孔子家語·入官篇)
공자가 학문적으로 대성한 것은 정치인으로서는 실패하고 고향에 돌아온 말년이다. 그의 고향 곡부(曲阜)는 산둥성 남부의 소도시로 사수(泗水)가 흐르는 곳이다. 나이 일흔셋에 졸(卒)한 공자는 일흔살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다시 모아 후학들을 길렀다. 한 번은 사수천변을 거닐다가 제자들 보고 “밤낮없이 흐르는 이 냇물처럼 세월이 흘러 나도 이제 늙었구나!” 하고 세월의 무상함을 한탄했다.(論語·子罕篇)
정치가로서는 실패하고 후학 양성엔 성공한 공자의 생애는 오늘날에도 교육의 중요함이 얼마나 큰가를 말해준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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