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산성 복원

성곽사(城郭史)로 보아 기원 전후는 1기에 해당한다. 성읍국가에서 전제왕권이 확립된 시기다. 방어용 축성이 활발하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산세가 많아 주로 능선을 이용한 산성이 축성됐다.

이 무렵 산성 축성의 기술상 특징은 돌을 이용한 내탁식 방법인 점이다. 자연석을 그대로 썼다. 활석의 평평한 한쪽면을 성벽 바깥쪽으로 맞대어 쌓고, 그 안쪽에 석재에서 나온 돌 부스러기를 넣은 다음에 다시 그 안쪽을 흙과 잡석으로 채웠다. 최소의 작업량으로 최대의 효과를 보는 공법이었던 것이다.

여주 파사산성(사적 251호), 이천 설봉산성(사적 423호)은 성곽사상 1기에 해당된 축성이다. 삼국시대가 갓 시작될 무렵이다. 그런데 이를 복원한다는 것이 되레 망쳐놨다고 한다.

본보 동부취재팀의 기동취재 보도다. 아닌게 아니라 엉망이다. 기사도 그렇지만 보도사진을 봐도 한 눈에 드러난다. 복원했다는 설봉산성 모양새가 마치 담벽 같다. 산성의 형태라고는 도시 찾아볼 수가 없다. 자재도 자연석이 아닌 화강암 자재를 벽돌처럼 채곡채곡 쌓은 게 활석을 이용한 내탁공법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엉터리 복원을 위해 지난 10년 동안에 10억원이 쓰였다.

파사산성도 마찬가지다. 일부는 설봉산성처럼 원형과 판이하게 복원된 가운데 붕괴된 성벽이 장기간 방치되어 본래의 자재인 자연석이 소멸해가는 것으로 기사는 전했다.

국내 학계에서 성곽문화재 연구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1960년대다. 그 이전에는 일제시대에 일본의 식민지사관으로 고찰된 불행한 과거가 있다. 1960년대 석조문화재의 대가였던 황수영 동국대 교수는 경주 불국사 경내의 일제 석축을 문화재 침탈로 보아 개탄했다. 일제가 보수하면서 원래의 자연석이 아닌 일본식인 간사(間沙)돌로 쌓았기 때문이다. 조상들은 고대축성에서 간사나 견치(犬齒)돌을 쓰질 않았다.

설봉산성 등 복원은 원래의 복원이 아닌 일제식 변형이다. 이런 고증을 누가 내놨는 지 규명돼야 할 일이다. 도대체가 하는 일들에 책임 의식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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