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정조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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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 타파 평등사회 꿈꾼 개혁군주

“왕안석의 고집이 너무 지나쳤지만, 그 재주야 어찌 세상에 쓸 만한 것이 없겠는가, 신종(神宗)이 왕안석을 등용한 것을 보면 그 역시 큰일을 할 수 있는 임금이었음에 틀림없다”

1791년(정조 15) 4월30일 어전회의에서 정조가 신료들에게 한 말이다. 조선사회에서 왕안석(王安石)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송나라의 대표적 개혁론자인 왕안석은 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재정·사회·군사 등각 방면에 신법(新法)을 도입,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개혁 추진자들의 경험부족과 타락, 그리고 사마광(司馬光)과 같은 정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왕안석의 시행착오는 조선시대 정치에 큰 영향을 주어 잘못된 정치의 표본이 되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조는 왕안석의 실패로 인해 역사속 대부분의 임금과 신하들이

경장(개혁)을 하고 싶어도 감히 마음먹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개혁정치를 위해 금기의 벽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의 생각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의 장점을 취하여 세상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혁명을 통한 제도의 변화는 일시적으로 가능할 수 있으나 개혁을 통해 모든 이들이 상생해 나가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어려운 개혁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바친 이가 바로 정조다.

조선의 국왕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고통의 바다로 들어가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절대 권력을 가진 조선의 국왕을 부러워하며 그가 가진 권능을 내 자신이 마음껏 휘두르는 것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국왕이 국왕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고통을 참으면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단 한순간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조선의 국왕이 하루에 평군 4시간도 자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행동 대신 수많은 신하들의 감시와 충고를 받으면서 관습과 제도에 따른 인형과도 같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이라는 국가와 경제적·신분적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희생한 국왕이 바로 정조다. 어쩌면 백성을 위해 초인적 의지를 가지고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

어린 시절 부모와 이별한다는 것은 개인의 삶에 있어서 치명적이다. 그가 아무리 어린 시절부터 고매한 인격을 지녔다 하더라고 인간인 이상 가족과 영원한 이별은 참을 수 없는 슬픔이다. 바로 11살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와 비극적인 이별을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역적의 아들이라는 오명이 은밀하게 뒤를 따랐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조의 조부였던 영조는 왕실의 계통을 바꾸면서까지 11살에 죽은 자신의 큰 아들인 효장세자에게 정조를 입양시키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이 된 것이다. 정조는 이러한 정통성의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성리학 연구에 충실했고, 그 어떤 무인보다 무예가 뛰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활쏘기와 검술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드라마 이산에서 나오는 것처럼 정조는 학문에 능통하고 자신을 호위하는 숙위소 군사들보다 더 뛰어난 활쏘기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국왕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 바탕에 충실한 정조는 보다 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조금씩 실천하였다. 정조가 국왕으로 등극할 때 조선은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었다. 우리가 흔히 영·정조 시대를 조선후기 문예부흥이 시대로 평가하고 있기에 무척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시기로 착각하고 있다. 문화라는 것이 경제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절대 발전할 수 없다는 현재 자본주의 논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17세기 태양계 전체에 발생한 소빙하기로 인하여 지구는 극심한 엘니뇨 현상으로 가뭄과 홍수가 빈번하여 어려운 현실에 놓이게 되었다. 한반도 역시 지구 전체를 강타한 소빙하기를 피할 수 없었고 숙종, 영조대에 이어지는 천재지변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극에 달하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국왕을 중심으로 관료와 일반 백성들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해도 모자라는데 조선은 관료와 사대부들의 사상 다툼이 백성들의 삶의 고통을 망각하고 말았다. 물론 개중에는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의 경제적·신분적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집단이 존재하였지만 이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조선의 어려움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해 1778년(정조 2) 6월에 ‘경장대고(更張大誥)’를 발표하였다. 정조는 당시 사회가 큰 병이 든 사람이 眞元이 허약해져서 혈맥이 막히고 혹이 불거진 상황과도 같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사회를 타개하기 위해서 민산(民産)·인재(人才)·융정(戎政)·재용(財用)의 4항목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혈맥이 막히고 혹이 불거진 상황이라면 이것은 거의 죽기 직전의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겨우 숨만 쉬고 있는 인간을 다시 광활한 대지를 달릴 수 있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정조는 백성들의 재산이 풍부해지기 위해서 새로운 경제제도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시전상인으로 대표되는 독점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던 ‘금난전권(禁難廛權)’을 혁파하는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수립하였다. 기득권층의 반발은 당연하였지만 정조는 백성 누구나 상업행위를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수요와 공급 등 유통구조가 원활해지면 국가의 경제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끝내 관철시켰다.

정조는 국가가 발전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인재를 양성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두 가지 방안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것은 일차로 공교육의 강화이고 둘째로 인재를 선발하여 집중적으로 교육시키는 일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국가재정의 취약으로 지방 향교에 제대로 된 교육 지원을 할 수 없던 것을 교관 파견 등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평민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보장하였다. 더불어 규장각을 설치하여 검서관과 초계문신을 둠으로써 이들을 통해 학문 발전과 국가의 미래 정책을 수립하게 하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교육을 누구 못지 않게 받았음에도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서얼들을 중용하고 이들로 하여금 규장각에서 동서고금의 서적을 열람케 하여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는데 온갖 성의를 다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결국 인재 양성은 신분제 차별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로 나가고자 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군사제도에 대한 것이었다. 요즘도 국가 예산의 22%가 국방비로 가장 큰 예산이듯이 조선시대에도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조가 즉위 초에 무려 56%나 되었으니 가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기고의 칼과 창은 녹슬어 있고 활은 아교가 녹아 쏠 수가 없었다. 더불어 고위급 무관이 넘쳐나 예산만 낭비되고 있으니 한심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국방개혁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위해 유사한 군사기구를 통합하고 더 나아가 아예 폐지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국방비를 절감하였고 이를 경제 활성화와 사회 복지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금위영과 어영청에 지급될 비용의 상당수를 화성 축성에 토목공사비로 지급하였다. 이러한 화성 축성은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기술자 및 일반 백성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하여 경제적 안정의 기틀이 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와 같은 일련이 개혁 정책 추진으로 국가 전체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사회를 만들고 더 나아가 중국을 비롯한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곧 조선이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라고 하는 중화(中華)의식을 가지고 병자호란의 치욕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개적으로 북벌을 이야기 하지 않았지만 선대왕의 능행차 때마다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조선의 군사들에게 중원 대륙으로 전진 할 수 있도록 마상무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더불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단군을 비롯한 주몽·박혁거세·온조·왕건 등 국가 창건 시조에 대한 대대적인 제사를 실시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모든 개혁정책을 완수하기 위해 자신의 친위도시이자 개혁의 시범도시로서 화성을 건설하였다. 그곳 화성에서 저수지와 국영농장인 둔전을 개발하여 토지없는 백성들이 와서 농사를 짓게 하여 농업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성곽 내에 서울과 같은 시전을 설치하여 전국에서 대표적인 상인들을 유치하여 화성을 중심으로 국내 및 국제적 상업 교류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조선후기 동양 삼국 성곽문화의 결정체이자 서양의 기술까지 합쳐버린 화성은 훗날 세계인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문화유산로 등록되었고 이를 기록한 화성성역의궤 역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비록 그가 자신이 영원하던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1880년 6월28일 승하했지만 그가 이루고자했던 꿈과 희망은 늘 우리 곁에 함께 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는 그의 꿈을 이루어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 그리고 자주적인 나라를 건설하여 영원히 아름다운 나라를 후세에게 물려 줄 것이다. 지금도 세계문화유산 화성과 그가 묻혀 있는 건릉(健陵)을 거닐 때마다 그의 따스한 체온이 다가오는 듯하다.

/김준혁 수원시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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