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겨울 미국의 워싱톤DC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해 겨울 미국 동부엔 몇 십 년만의 혹한이 찾아와 기온이 연일 영하 20도를 밑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숙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바깥 날씨가 어떤지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난방이 잘 되어 있었다.
또한 당시 필자가 머물던 숙소의 창 너머에는 고층빌딩들이 즐비했는데 대부분이 회사 사무실이었다. 그런데 필자가 놀랐던 것은 그 숙소에 머물던 열흘 가량 동안 빌딩 사무실의 전등이 꺼진 적이 없었던 점이다. 낮이든 밤이든 사람들이 있든 없든 늘 전등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 건물의 어느 누구도 전깃불을 켜고 끄는 일에는 전혀 무심한 것 같아 보였다.
전반적으로 미국 사람들은 에너지를 그야말로 물 쓰듯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편리하긴 했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던 경험이었다.
이번에는 몇 해 전 여름에 독일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의 경험이다. 필자가 방문했던 당시 유럽은 유래 없는 폭염에 휩싸여 있었다. 더위로 인해 유럽의 노약자 사망자 수가 연일 기록을 갱신해 가고 있었다.
그때 필자가 택시를 탔는데 택시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차창들을 모두 열고 다니고 있었다. 택시뿐 아니었다. 호텔방, 버스, 전철 어디를 가도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독일 같은 선진국에서 왜 에어컨을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 독일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인즉 그 해의 더위는 극히 이례적인 더위일 뿐 예년에는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아 에어컨 없이도 견딜만하다고 하였다. 그래도 더운 날이 있을 것 아니냐고 재차 물었더니 일 년 중 그 며칠을 위해 에어컨을 설치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이때는 몸이 덥긴 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배럴당 50달러에도 못 미치던 유가가 140달러를 넘었을뿐만 아니라 연일 천정부지로 치솟아 신기록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가위눌릴 지경이다. 트럭 운전자들의 파업 사태에 이어 농어민들이 한탄하는 뉴스를 보며 기름이 우리네 일상 삶에 얼마나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새삼 느낀다. 70, 80년대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 우리는 등목, 손부채, 선풍기 그리고 수박화채나 미숫가루로 거뜬히 여름을 견뎌왔다. 또한 몹시도 매운 겨울추위는 내복과 두툼한 오리털 파커로 맞섰다. 그러다가 소득 증대와 기술 발전의 덕분으로 우리네 삶은 편리함과 쾌적함을 향해 마냥 나아갔다. 손부채로 족할 더위는 에어컨으로 맞서고, 내복만으로 해결할 추위는 보일러로 해결하게 되었다. 과거 능히 걸을 만한 거리이건만 지금은 차 없으면 엄두도 못 내게 되었다. 그러고서는 운동부족을 이유로 런닝머신 위에서 땀 흘리며 뛰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초고유가 시대에 문득 발견케 되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 아닐까.
나이 들어 갈수록,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을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만큼만 먹어야 하고, 육신의 편안함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몸을 부려 움직일 만큼은 움직이는 것이 이른바 ‘웰빙’이요 참살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이것이 어디 한 개인으로서의 삶의 방식에만 국한되는 말일까.
초고유가 시대를 맞아 무분별하게 비둔해진 우리 사회 전반적인 삶의 방식 속에 있는 군살들을 빼내기 위해 우리 모두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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