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한국 오페라가 60주년을 맞이했다. 그래서 지난 9월 21일, 서울에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는 우리나라 오페라 관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이를 기념하는 심포지움과 갈라 콘서트를 열었다. 1948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에 올랐던 오페라는 베르디의 ‘트라비아타’였다. 당시는 이 작품을 ‘춘희’라고 했고 지금까지도 이 이름을 쓰는 경우가 있어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오페라 ‘트라비아타’는 프랑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뒤마의 ‘동백아가씨’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작곡가 베르디는 파리에서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든 공연을 보고 감명을 받아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것이 ‘트라비아타’로 결실을 맺은 것이다. 당시 파리에는 베르디의 연인이자 동반자였던 주세피나 스트레포니가 살고 있었고 공연차 파리에 들렀던 베르디는 스트레포니와 함께 이 연극을 관람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던 베르디는 양조업자인 안토니오 바레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학업의 기회는 물론 작곡가로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까지 얻을 수 있었다. 이후 바레치의 딸 마르가리타와 결혼하였으나 얼마지 않아 자녀와 아내를 차례로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게 되었고, 이후 자신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를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살았지만 오랜 동안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는데, 이는 베르디가 죽은 아내와 장인이자 은인인 바레치에 대한 의리, 세간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베르디보다 스트레포니가 결혼을 더 주저했었고, 그것은 자신이 한 때 테너 가수의 정부로 살았다는 오점이 있어 이것의 베르디의 명성에 누가 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이 있었기에 이탈리아를 떠나 파리에서 만난 두 사람의 사랑은 더욱 자유롭고 뜨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들의 눈에 비친 연극 ‘동백 아가씨’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마치 그들의 이야기인 양 마음을 뿌리 채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뒤마의 소설 ‘동백 아가씨’의 주인공 마르그리트는 당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떨쳤던 마리 뒤 프레시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노르망디에서 태어나 14살에 가출하여 파리로 간 알퐁신 프레시는 마리 뒤 프레시라는 이름으로 파리의 사교계를 주름잡았으나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이별의 아픔을 잊으려 여행 중이었던 뒤마에게 연인의 죽음은 또 한 번의 충격이었고 결국은 마리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게 만들었다.
마리 뒤 프레시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소설 속의 마르그리트는 동백꽃을 좋아해서 한 달에 25일은 흰색 동백꽃을, 나머지 5일은 붉은색 동백꽃을 머리에 꽂았기 때문에 동백 아가씨로 불렸다. 이 소설이 일본어로 번역되면서 ‘椿姬’가 되었고 오페라보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먼저 전해졌기 때문에 나중에 들어온 오페라까지 ‘춘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생각하면 그렇게 부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지만 한자어 ‘椿’은 사실 동백이 아니라 참죽나무를 일컫는 말이니 그것마저 간과할 문제는 아닌 듯싶다.
한국 오페라 6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무대에 올랐던 오페라 ‘트라비아타’를 생각해 보았다. 한국 오페라 60주년 심포지움에 이런 가벼운 이야기도 함께 있었더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60년 동안 우리 오페라의 당면 과제는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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