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은행의 빚 독촉을 받았다. 집 살 때 떠안은 빚이다. 그리 많은 돈은 아니다. 3천만원이다. 벌집 같은 다세대 주택이다. 그래도 그에게는 가족과 더불어 사는 삶의 보금자리다.
여러 달 연체된 빚 독촉이 아니다. 매월 말일에 입금시켜야 할 것을 넣지 못한 지 불과 닷새가 지나니까 급하게 재촉하는 은행 직원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이다. 한데, 그에게는 엉뚱한 고민이 생겼다. 이자가 갑자기 4만원 가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주택 담보대출 금리가 10%를 넘어선 연유이지만, 그에게는 월급에서 거의 하루 일당 가까이 해당되는 금액인 것이다.
마음이 답답하여 처사촌 동서에게 하소연했다. 그런데 그 동서는 “그런 걱정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며 “나는 거덜날 지경”이라고 되레 푸념하더라는 것이다. 처사촌 동서는 자그만한 공장을 하면서 빌려쓴 은행빚이 만기도 안 됐는 데 원리금 상환 독촉을 받고있다는 것이다.
은행들 입장도 괴롭긴 마찬가지다. 달러 가뭄에 목말라 있다. 유동성 관리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다. 자체적인 자금 조달을 위해 이자율을 경쟁적으로 올린 은행채 발행에 힘쓰는 데도 팔리질 않는다. 고금리 예금 신상품을 내놔도 인기가 없다. 은행들도 갚아야 할 빚이 많다. 은행도 몸이 단다.
대통령은 ‘은행이 살려야 할 기업은 살려 흑자도산을 막아야 한다’고 했다. 지난 13일 라디오 정례 연설에서 그같이 말했다. 그러나 은행들 반응은 시큰둥한 것 같다. 대통령 ‘말씀’으로 신용경색이 풀릴 조짐은 없다.
원론적인 ‘말씀’보다 중요한 것은 물꼬를 트는 팩터(factor)에 있다. 예컨대 유럽이나 미국은 정부가 은행간 거래에 지급 보증을 설 움직임을 보인다. 은행의 대외 공신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런데 한국 정부는 “아직은 아니다”라며 타이밍을 놓쳐간다. 말만 앞세우는 말은 아무리 좋아도 공수표다. 대통령의 연설이 있던 날 주가가 오르고 환율이 떨어진 것은 미국과 유럽이 금융위기에 대해 공조체제를 갖춘 데 기인한다. 그런데도 “대통령이 연설하자마자 주가가 오르고 환율이 떨어졌다”고 말한 것은 청와대 발표다.
그같은 발표는 현실 인식의 미흡을 드러내는 점에서 심히 걱정된다. 신용경색을 가져온 것은 미국발 금융위기이긴 하나, 기왕 이렇게 된 상황에서 위협적인 것은 외적 요인보다 내적 요인이다. 주택담보 대출은 300조원이 넘고 가계대출은 500조원이 넘는다. 미국의 경제위기는 주택담보 대출의 파탄에서 시작하여 지금 신용카드 대란으로 이어졌다. 한국도 자칫 잘못하면 미국과 같은 수순으로 갈 공산이 많다.
가계의 채무 건전성 지수가 위험 수준인 80 아래로 떨어져 75.1이라는 것은 한국신용정보연구소의 분석이다. 은행에 집을 잡혀 돈을 빌려쓴 집값은 떨어지는 데 비해 이자는 올라가고, 벌이는 신통찮아 가계빚 또한 늘어만 가는 것이 서민층 생활이다.
은행으로부터 주택담보 대출금 상환 독촉을 받았다는 그 사람도 모자란 생활비를 신용카드 서비스를 조금씩 빼내어 때우고 있다. 그렇다고 돈이 따로 생기는 것도 아니여서 카드 대금은 돌려 막기가 일쑤다. 하다하다 안 되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의 처사촌 동서 되는 사람의 공장은 제품이 안 팔려서 은행돈을 갚지 못한다. 더러 팔려서 받은 어음은 부도가 나기도해 운전자금이 돌아가지 않아 흑자도산의 지경인 것이다.
그와 그의 처사촌 동서만이 이런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널려있는 것이 그와 그의 처사촌 동서같은 사람들이다.
미국발 경제위기로 온갖 경제논리가 쏟아져 나온다. 온갖 말이 다 나오지만 그와 그의 처사촌 동서는 그런 어려운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서민층의 생각이 거의 다 이렇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일거리며 일터가 있어 노력의 대가를 제대로 받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가 잘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 잘난 이들의 그 많은 경제논리가 이를 풀지 못하는 것을 서민층은 되레 이상하게 여긴다.
일거리며 일터는 일자리 만들기, 장사가 잘 되는 것은 내수진작으로 요약된다. 이명박 정부가 진정 지금의 위기를 타개코자 한다면 ‘좌고우면’하면서 갈팡질팡하기 보다는 목숨을 걸고 몸을 내던져야 한다. 수도권 규제를 풀어 재벌기업의 50조원대 투자를 유발케하는 것은 그같은 결단이다.
서민층이 은행을 무서워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은행도 살기가 어렵다. 그와 그의 처사촌 동서는 “은행이 무섭다”고 한다. “은행에서 전화만 걸려와도 가슴이 철렁한다”고들 말한다. 문제는 그들만이 그러는 게 아닌 데 있다. ‘은행이 무섭다’는 말은 그 책임이 은행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부에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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