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기술자란 게 있다. 혐의 사실의 자백이나 조작된 범죄의 시인을 강요하는 수단이다. 고문을 해도 육체적으로 증거가 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육신의 고통을 참기가 힘겹도록 가하는 기술이다.
이근안 경감은 고문기술자로 불렸다. 1985년엔 경기도경 대공분실에 근무했었다. 그 해 민청학련 의장이던 김근태 전 국회의원을 고문하면서 불법을 자행한 혐의로 수배됐던 게 1988년 12월이다. 무려 10년 10개월의 도피 행각을 벌였다. 잡지않는 것이냐, 못잡는 것이냐는 등 의문이 분분하던차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징역 7년을 선고 받았다. 여주교도소를 출소한 것이 2006년 11월이다.
이런 그가 목사가 됐다. 교도소에서 복역 중에 한국교정선교회의 통신교육을 통해 신학을 공부했다. 출소한 뒤엔 총회 신학교를 졸업했다. 전도사가 되어 100여회의 집회에 간증을 다녔다. 선교목사의 안수를 받은 것은 지난달 30일이다. 이날 한국교회 100주년기념관에서 가진 목사 임직 예배자리에서다. 기독교 관계자들은 그를 가리켜 “기독교인으로 완전히 거듭났다”고 말했다.
고문 기술자의 목사 변신은 상전벽해와 같은 변화다. 1970년 순경으로 출발, 경감까지 올랐다. 이 과정에서 자행한 그의 고문 기술은 나름대로의 생각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놓고 생각해 보니 정권의 주구 노릇을 한 것밖에 안 된다는 참회가 들었을지 모른다. 교도소 복역 중 신학에 심취한 게 그같은 짐작을 하게 한다.
그의 회개는 시사하는 의미가 크다. 정권은 유한하다. 유한한 정권에 충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력의 남용은 영달이 아닌 폐가망신의 길임을 일깨웠다. 오늘의 권력자들도 깊이 새겨둬야 할 일이다.
고문의 달인이 선교목사가 된 큰 변신을 보면서 그의 용기있는 결단을 높이 산다. 뒤늦은 신학 공부에 어려움이 많았을 터인데도 애로를 극복해낸 것은 인간 승리다.
나이 70이다. 인생 칠순에 제2의 인생을 새 출발하는 목회자의 앞길에 노익장의 축복이 있기를 빈다./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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