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 ‘홍등’을 보고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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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모우의 영화 ‘홍등’이 발레로 변신해서 우리 곁을 찾아왔다. 장이모우라면 영화 뿐만 아니라 자금성에서 펼쳐 보인 오페라 ‘투란도트’와 바로 얼마 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베이징 올림픽 개·폐막식까지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풍운아이다. 그런 그가 발레에까지 손을 뻗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그의 영화를 알았던 사람이라면 발레로는 성이 차지 않았을 것이고 발레를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밋밋하고 싱거웠을 수도 있다. 장르와 장르를 넘나들거나 뒤섞는 ‘크로스오버’나 ‘퓨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 중국이 부쩍 이 일에 재미를 내고 있다. 발레와 서커스를 하나로 묶어 내놓는가 하면 영화와 서커스를 묶는 일도 없지 않다. 포인트 슈즈를 신은 발레리나가 건장한 남성의 머리 위에 서서 아라베스크 동작을 보여주는가 하면 영화 ‘와호장룡’의 대나무 숲 결투 장면을 연상시키는 서커스 무대를 연출하기도 한다. 대나무처럼 연두색을 띤 밧줄을 수도 없이 매달아 두고는 하늘을 나는 것처럼 그 사이 사이를 재빠르게 누비고 다니면서 검술을 펼치는 것이다.

‘홍등’의 경우는 이 보다 훨씬 더 많은 요소들이 결합하고 있다. 돈 많은 영감의 세 번째 부인으로 첫날밤을 맞이하게 되는 주인공의 필사적인 저항은 ‘그림자극’의 형태로 묘사되고 이어지는 축하 피로연에서는 ‘경극’이 무대에 오르게 된다. 이보다 작게는 한족의 전통춤 동작을 적용시킨 군무를 찾기도 하고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춤사위들을 폭넓게 활용하려는 의욕을 짐작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는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음악의 어법들이 시대를 넘나들고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다. 우리 귀에 익숙한 19세기 조성음악에 20세기 이후 시도되었던 여러 현대음악 기법들이 어우러져 있고 서양 악기를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라를 기본으로 필요할 때마다 중국의 전통 악기들이 그 장면에 맞는 음색과 음향을 더해주고 있다.

영화와 발레를 같은 비중으로 취급해서는 영화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발레를 충족시킬 수도 없다. 영화 ‘홍등’이 ‘아내들과 첩들’이라는 소설을 영화에 맞게 각색한 것처럼 발레 ‘홍등’도 영화 ‘홍등’을 발레에 맞게 해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그러기에는 안무를 맡은 왕신펑과 왕유엔유엔의 무게가 장이모우를 감당하기 힘들어 보인다. 베르디가 쉐익스피어의 ‘맥베드’를 오페라로 만들면서 결국 원작의 굴레를 과감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것처럼 ‘홍등’의 안무자들도 마찬가지 입장이었을 것이다. 베르디 같은 대가가 이미 오래 전에 죽고 없는 쉐익스피어의 작품을 마음대로 어쩌지 못했는데, 왕신펑과 왕유엔유엔이 살아서 그들과 함께 숨쉬고 있는 장이모우를 거슬렀을 리는 만무한 일이다.

‘멕베드’가 아쉬웠던지 베르디는 쉐익스피어의 다른 걸작 ‘오델로’에 손을 댔다. 그리고 이번에는 원작의 반을 덜어내는 대수술을 감행했고 그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소설이나 희곡을 무대나 영상으로 옮기는 것보다 영화를 무대로 옮기는 작업이 훨씬 어렵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영상이 무대보다 자유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뮤지컬의 제왕이라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조차도 헐리우드의 영화 ‘선셋 대로’를 뮤지컬로 만들어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원작이 성공작이었을 경우 무대로 옮기는 작업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대치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그래도 발레 ‘홍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전에 없던 도전이자 모험이고 다음 있어야 할 작업에 소중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에는 장이모우의 ‘홍등’이 아니라 중국국립중앙발레단의 ‘홍등’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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