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얘기를 듣는 것이 늘 부담스러웠다. 아니, 따분했다. 말씀인즉슨은 구구절절이 옳지만 왠지 그랬다. 나의 어렸을 적 기억이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날은 해방된 듯한 기분이었다. 출장 가셨을 적의 일이다. 출장 기일이 오래 가길 바라곤 했다. 어머니가 잠시 집을 비우면 텅 빈듯이 허전했으면서도, 아버지가 집에 안 계시면 그토록 좋았다.
철이 들어서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역시 거북했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한다. 그 분의 의지력은 지금도 내가 배워야 할 강점이다. 그런데도 대화는 내키지 않곤 했다. 생각하면 대화라기 보단 일방적인 설교가 많았다. 아버지 생전에 당신께서 자신의 인생관을 강요한다고 여겨졌던 것이 젊었을 적의 기억이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가 되면 아들과 기탄없는 토론으로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멋진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아버지와는 좀 다른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다. 나도 결국은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내 아들 또한 내가 아버지를 거북하게 여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거북하게 대한다.
아들만이 아니다. 보면 아들도 고등학생인 제 아들과 대화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제 아들을 더러 탓하는 소릴 듣지만 아니다. 손주 녀석은 내가 생각하기엔 제 애비보다 장점이 더 많다.
물론 부자간에 대화가 잘 되는 집안이 적지않다. 하지만 일상으로는 잘 안 되는 집이 더 많아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같은 보편적 현상의 의식 차이를 크게 보면 세대 차이다. 세대 차이는 인류의 기원 이래 있어왔다. 인류의 발전은 거듭된 세대 차이에서 변증법적으로 전개됐다고 보는 것이 문화인류사의 해석이다. 인간의 가치관과 생활방식, 사회의 관습이나 제도, 이밖에 언어·학문·예술·종교 등 문명 및 문화의 전통과 발달 과정이 다 이에 포함된다.
미래학은 인간의 갈등 심화를 완급의 충돌로 전망한다. 요즘말로 하면 예컨대 보수적 개혁과 진보적 개혁의 충돌이다. 비단 정치만이 아닌, 인간사회 제반의 이런 갈등이 앞으로 갈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갈등의 본질이 완급으로 집약된다. 따라서 세대 차이 역시 기성세대와 신생세대 간의 가치관 해석을 완급의 차이로 보는 것이다.
세상에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 아들을 위한 노파심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타이르는 것은 아버지의 자유다. 이와 비례해서 아들의 자유도 있다. 마치 붕어빵을 구워내듯 아버지와 같길 바라는 아버지의 생각을 거부할 자유 또한 아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아들은 아들나름의 인생이 있고, 이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아들 고유의 몫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대화가 소원하다고 해서 서로간 혈육의 정이 없는 것은 더욱 아니다. 대화는 표현(表現)이다. 표현의 대화가 있지만 묵언(默言)의 대화도 있다. 말이 없는 가운데 부단히 나누는 대화는 묵언의 대화로 이것이 곧 짙은 혈육의 정인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흔히 효(孝)를 말한다. 효는 인륜의 근본이다. 다만 시대생활의 변천에 따라 효의 형태가 달라진다. 현대사회에서의 가장 큰 효는 아들이 부모, 즉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물심 양면의 걱정을 끼치지 않는 더 이상의 효도는 없다. 제몸 건강하게 간수하면서 제 힘으로, 제 처자식 잘 거느리고 사는 것이 부모에 대해 더 할수 없는 진정한 효도다. 반대로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가장 바람직 한 것은 아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일이다.
경제 불황으로 아동복지시설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날로 늘어간다는 본지 보도가 시선을 끈다. 도내 27곳이 지난해 이맘 때보다 배가 넘는 667명에 이르러 초만원 상태라는 것이다. 이러고도 문의가 잇따른다니 걱정이다.
아이를 버리다시피 그런데다 맡기는 것은 가족이 해체된 탓이다. 상반된 두 가지 심정이 든다. 짐승도 다 클 때까지는 제 새끼를 버리지 않고 돌보는 데 아이를 짐스러워 한 것에 인간적 공분을 느낀다. 또 한편으로는 형편이 오죽했으면 자기 아이를 남에게 떠맡기겠느냐는 생각에서 측은지심이 든다.
불황이라지만 불황을 넘어 가히 공황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그 중심은 부부이지만 아들도 한 축을 이룬다. 아들 얘기만 해서 딸들 분 한테 미안하다. 개인적으로 딸이 없기도 하지만, 딸 역시 소중하긴 마찬가지다. ‘부모를 위하는 것은 아들 며느리 보다 딸이다’란 말을 많이 들었다.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거북하게 여기긴 했어도, 아버지 슬하에서 자랄 수 있었던 것을 항상 행복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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