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서 20세기는 확실히 러시아 연주자들의 시대였다. 악기별로 최고의 연주자들을 나열하다 보면 둘 중의 하나가 러시아 출신이고 그들이 남긴 업적과 후광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로스트로포비치는 20세기 내내 첼로의 제왕이었고 유리 바슈메트는 지금도 여전히 비올라의 지존이다. 그런가 하면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는 벌써부터 세인들을 경악시키면서 트럼펫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 이런 불가사의한 현상을 두고 혹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 체제에서나 가능했던 소수 정예의 선발과 가혹한 훈련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비단 그것 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나고 없는 소비에트 시절의 거장들을 떠올려 보면 연주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면에서 참으로 특별한 기억을 남긴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는 어떤 연주회에서든 악보를 펼쳐놓고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더욱이 그 악보를 바로 위에서 비추는 한줄기 조명 말고는 무대나 객석 할 것 없이 일체의 빛을 차단했다. 연주회장 밖에서의 유별난 점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소공포증이었다. 당연히 비행기 여행을 기피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해외로 연주여행을 나갈 때도 육로와 해로를 이용했다고 한다. 땅덩어리가 넓은 러시아를 기차나 자동차로 벗어나려면 꼬박 며칠이 걸리기 마련이었는데, 오지를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면 리히테르는 가장 가까운 마을에 숙소를 정하고 예정에도 없는 연주회를 열어 그곳 주민들을 초청하곤 했다. 물론 마땅한 연주회장이 없는 경우가 더 많았지만 피아노가 있고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만 있다면 촛불을 켜고서라도 피아노를 쳤다. 언젠가 시베리아의 어느 외진 곳을 지나다가 밤을 맞은 리히테르는 늘 하던 대로 그곳 주민들을 위한 조촐한 연주회를 열었다. 그 자리에는 그 누구보다 리히테르의 음악에 넋을 잃어버린 한 소년이 있었다. 그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 그 소년은 음악가의 길을 걷게 되고 훗날 세계적인 바리톤 가수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드미트리 흐보로브스키이다.
그러고 보면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의 거장들 가운데는 이렇듯 고국산천의 방방곡곡을 다니며 연주회를 열었던 음악가들이 많았던 것 같다. 물론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당국의 방침과 지시를 따라 그렇게 하기도 했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할 때 상당수의 연주자들은 스스로가 원했던 것 같고 심지어는 다른 활동을 줄이거나 없는 시간을 쪼개서 방문연주회에 힘을 쏟았던 경우도 적지 않다. 20세기 중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쌍벽을 이루었던 또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싶다. 마니아들 사이에서 코간은 확실히 오이스트라흐와는 대조적이면서 그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거장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는 오이스트라흐가 군림하던 시대를 살았던 또 한 사람의 바이올리니스트일 뿐이다. 바로 그 오이스트라흐가 심사위원을 맡았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우승을 하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코간이었지만 내성적인 성격과 한 사람의 확실한 선전도구를 필요로 했던 소비에트의 정책으로 말미암아 늘 오이스트라흐의 그늘에 가려야 했다. 주로 국내 무대에서 활동을 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던 코간도 간간이 있었던 해외 연주회에서의 놀라운 성과와 반응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지만 58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빈에서의 연주회를 끝낸 지 불과 며칠 후, 또 다시 홀로 기차에 몸을 실은 코간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2009년 신년 벽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거장들의 따뜻한 음악이 그립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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