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과 법치

‘밤새 안녕하십니까?’라는 아침 인사말은 듣기 따라선 참 싱겁다. 한데, 과거에 이런 인사법이 있었다. 길 가다가 지인을 만나면 한다는 인사말이 ‘어디 가십니까?’하고 묻는 것도 생각하기 나름으로 말하면 사생활 침해다. 그런데 이같은 인사가 보편화됐던 연유가 있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보릿고개 시절에 ‘진지 드셨습니까?’하는 상대에 대한 관심이 인사말이었던 것 처럼.

밤이 불안했다. 갑신정변, 동학란, 청일전쟁, 일본의 조선 강점, 징용 및 위안부 징발 그리고 광복 직후의 이념적 사회혼란은 건국 후에도 계속됐다. 근세기의 밤은 이렇게 밤 사이에 무슨 일이 또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의 연속이었다. 불안한 밤은 6·25전쟁 3년동안 극도로 치달았다. 우익 진영은 좌익에게, 좌익 진영은 우익에게 끌려가 개죽음 당하기 일쑤였던 게 으레 밤이었던 것이다. 밤새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세태속에 밤새 문안은 당연한 아침 인사가 됐고, 상대의 행선지를 묻는 인사는 혹여라도 실종에 대비하는 친절한 배려였던 것이다.

난세다. 난세엔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 주먹은 폭력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필연적 사고도 나지만 우연적 사고 또한 잦다. 남도 창녕에서는 억새를 불태우다가 사람이 떼죽음을 당했다. 용산 철거민 참사도 떼죽음이다. ‘밤새 안녕하십니까?’란 인사가 새삼 실감난다. 도내에서는 길가는 부녀자를 7명이나 납치, 의문의 실종이 주검으로 확인된 살인마가 붙잡혔다. ‘어디 가십니까’라는 인사가 예전 일만은 아닐 것 같다.

다중의 폭력으로 법 위에 군림하는 ‘떼법’ 인식이 팽대해 있다. 용산 참사도 화염병 등 폭력화가 참사의 요인이다. 그런데 진압에 나선 경찰더러 ‘살인경찰’이라고 우긴다. 경찰이 불을 질러 경찰관이 포함된 철거민 등 6명을 불타 죽게 만든 증거는 없다. 경찰의 진압과정에 생긴 엉뚱한 사고를 빗대어 무조건 경찰이 죽였다는 것은 억지다. 화염병을 던져 불을 낸 개연성은 시위대쪽에 있다. 불까지 낼 고의성은 없는 위협수단이었을 지라도,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은 화염병은 시위대가 쌓아 두었던 폭력 도구이기 때문이다. 진압과정에 발생된 의문의 돌발사고 참사가 폭력시위의 불법성을 면책시키는 것은 아니다.

시위는 민주주의의 주요 방법이다. 그러나 폭력은 민주주의를 저해한다. 용산 참사의 경우, 세입자가 억울한 문제점은 동의한다. 좋은 말로 호소해서는 통하지 않는 고질적 병폐도 인정한다. 이는 행정 당국과 정부의 책임이다. 하지만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 공권력보다 우선시하는 폭력시위를 너도 나도 들고 나서서는, 밤새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기가 예사였던 세상처럼 막가는 세상이 된다. 민중의 삶만 더 고단해진다.

문제는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 등이다. 이들은 마치 빈민운동을 하는 것처럼 행세하지만 아니다. 빈민운동으로 말하면 돌아가신 제정구 선생이 대부다. 하지만 그는 폭력과는 거리가 멀다. 평소 빈민과 함께 생활하고 일하면서 구제운동을 벌였던 분이다. 지금 빈민층을 혼자 다 위하는 것 처럼 떠드는 사람들은 빈민을 팔아 호의호식하는 위선자들이다.

이런 위선자들이 폭력시위를 부추기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시위대가 전경을 때리는 것은 정의고, 전경이 시위대를 막는 물리력은 불의로 매도하는 그들은 다중의 폭력시위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선동한다. 국회의사당을 때려 부수는 것도 그같은 맥락이다. 그 저의가 뭔가, 뻔하다. 가능하다면 정권 퇴진을 가져오는 군중 폭동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4·19 혁명처럼.

그러나 아니다. 현 정권이 아무리 잘 한게 없을지라도 제2공화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군중시위가 정당화될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과거가 있긴 있다. 4·19 혁명도 그렇고, 5·18 민주항쟁도 그렇고, 6월 항쟁도 그렇다. 그러나 지금은 그같은 이유가 없다.

민중은 물론 살기 어렵다. 비록 살긴 어려워도 ‘밤새 안녕하십니까?’ ‘어디 가십니까?’하는 인사법의 세태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폭력은 추방돼야 하고, 폭력이 추방되기 위해서는 법치가 살아 있어야 된다. 이런 건 있다. 독재정치도 법치를 말했다. 그러나 독재는 끝난지가 벌써 20여년이다. 법치는 특정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국민생활의 안정을 위해 절실하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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