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시사는 지난 1919년 수원군에서 일어난 3·1운동이 4월3일까지 줄기차게 계속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주모자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른 사람이 무려 48명이다. 이분들의 명단이 나와 있다. 최하 징역 6월에서 최고 징역 7년을 살았다.
수원예기조합 기생 33명이 당시 수원경찰서 앞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것은 그 해 3월29일이다. ‘(전략)28일에도 30여명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29일에는 수원기생조합 기생 30여명이 김향화의 선창으로 자혜병원(지금의 팔달산 아래 수원경찰서 앞) 앞에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다(후략)’ 수원시사 ‘수원군의 3·1운동 전개’ 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그러나 독립만세를 부른 기생 전원의 명단은 기술이 없다. 안타까웠던 이 점을 수원박물관 이동근 전문위원이 발굴한 것은 쾌거다. 각종 기록을 추적 조사한 끝에 33명의 인적사항만이 아니고 사진까지 발굴하여 논문으로 발표된 것으로 보도됐다.
그 중 주동자로 징역 6월에 처했던 김향화가 수원보훈지청에서 독립유공자 추서가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은 낭보다. 무려 90년 전이다. 스무살이 갓 지난 꽃다운 나이 때다. 그러나 이젠 고인이 되어도 벌써 오래전일 것이다. 어디에 후손이 있는지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독립유공자 추서는 애국심에 불탔던 그와 동료들의 혼령에 위로가 된다고 보여 기대된다.
국내외 선열들의 이런 애국운동이 있음으로 하여 광복이 됐고 나라가 건국됐다. 참고로 말하면 ‘경기도 지방의 3·1운동은 21개 군 모두 일어나지 않은 곳이 없었고 3·4월 두 달 동안 225회의 시위운동이 있었다’고 수원시사는 기록하고 있다.
예기조합은 기생조합이다. 당시의 기생은 지금의 일본 ‘게이샤’와 같다. 기생학교인 권번에서 창(唱) 무(舞) 서화·시문 등을 익힌 예인(藝人)이다. 조선의 으뜸 명기로 꼽히는 황진이 역시 이런 예인이다.
일본의 기생인 게이샤는 특수 직종으로 아직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국내 기생은 1945년 이후 권번 폐지와 함께 사라졌다. 옛 수원 기생의 기개가 자랑스럽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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