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조엘은 한 때 뉴요커의 정서를 대변하는 가수로 일컬어졌고 앨튼 존, 스티비 원더와 더불어 건반악기를 가장 잘 다루는 싱어 송 라이터로 꼽혔다. 우리에게도 ‘져스트 더 웨이 유 아’를 비롯해서 ‘업타운 걸’, ‘피아노 맨’과 같은 대표곡들로 잘 알려진 팝 아티스트다. 지난해서야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그는 올림픽 체조 경기장을 찾은 많은 팬들에게 여전히 건재한 모습으로 열창을 들려주어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의 히트 곡들 가운데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라면 아무래도 ‘어니스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얼핏 듣기에는 연인을 향해 사랑을 애원하는 연가인 듯도 싶고 실연의 아픔을 노래하는 것도 같지만 뒷부분에 이르러 가슴이 찢어지는 듯이 쏟아내는 외침과 흐느낌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믿고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아 노우, 아 노-우-’를 푸념하듯이 뇌까린다. 한오백년의 후렴구인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 말고’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세상이 이렇다는 것쯤은 철들면서 누구나 다 알게 되는 사실인데 이렇게 노래로까지 만든 까닭이 무엇일까? 노래마다 다 사연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노래에는 좀 더 특별한 사연이 있다. 당시 빌리 조엘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고 당연히 천문학적인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모든 것을 믿고 맡겼던 매니저가 전 재산을 몽땅 가로챘던 것이다. 그 파렴치한 매니저는 남도 아닌 그의 처남이었으니 그렇게 당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빌리 조엘의 불후의 명곡 ‘어니스티’는 바로 그 때 겪었던 절망과 분노, 좌절과 상실을 고스란히 담은 노래다.
아티스트와 매니저의 관계는 사회에서 맺어지는 그 어떤 관계보다 서로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관계다. 그런데 정작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드러나지 않아 우리가 모르고 있는 나머지 대다수 중에는 서로에게 충실하고 서로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경우들이 더 많을 것이라 짐작하지만 더러는 차마 밖으로 드러내지 못해 속으로 감추고 있는 갈등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티스트의 입장에서 매니저라는 존재는 자신의 공식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금전 문제와 대인관계를 포함하는 사생활까지도 모두 알아야 하고 또 챙겨야 하기 때문에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맡길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혈육관계의 누군가나 배우자가 매니저로 나서거나, 매니저는 아니지만 그 역할을 대신하는 예가 많다. 세계무대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는 우리나라 연주자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장영주와 장한나는 부모가 그런 경우이고, 소프라노 신영옥씨는 언니가, 소프라노 조수미씨는 동생이 매니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지휘자 정명훈씨와 그의 형 정명근씨의 관계는 이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렇게 부모형제가 매니저의 역할을 하게 되면 서로의 관계가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렇다고 크고 작은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공과 사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는 까닭에 갈등의 골이 더 깊어져서 돌이킬 수 없게 되는 예도 없지 않다.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매니지먼트 계약을 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아스코나스 홀트 사의 사장은 직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늘 ‘자신이 관리하는 아티스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는 생각을 버리라’고 말한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매니저와 아티스트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티스트와 매니저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부딪히는 모든 인간관계에서 한번쯤은 되새겨 볼 만한 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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