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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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서 지명 유래
문헌에 이 고장을 가리키는 ‘율목군’이란 명칭은 있지만, 이전 원삼국시대와 선사시대 등과 관련된 기록들은 없다.
하지만 지난 1989년 평촌지역 문화유적 조사 시 석기시대 각종 유물들과 청동기시대 지석묘들이 발견돼 이 지역의 오래된 주거 근거를 알 수 있게 됐다.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에서 백제 근초고왕(346~375년) 때 백제의 영토가 됐다 고구려 장수왕(394~491년) 때 한강 연안 및 경기도 전역이 고구려 남쪽의 영토로 편입됐다.
‘안양(安養)’이란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창건된 안양사(安養寺)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통일신라 효공왕 4년(900년) 궁예의 후예인 고려 태조 왕건이 금주(시흥)와 과주(과천) 등지를 정벌하기 위해 삼성산을 지나던 중 산 정상의 구름이 5가지 빛으로 물든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부하를 보내 살피게 했다. 삼성산 정상에서 능정(能正)이란 노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왕건의 뜻과 같자 이곳(만안구 석수1동 산 2 일대)에 안양사를 창건하기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안양’이란 명칭이 탄생됐다.
조선시대에는 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능행을 위해 가설한 만안교의 ‘안(安)’자와 함께, ‘양(養)’자는 후손들에게 인륜의 근본인 효의 뜻을 살리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난 1941년 시흥군 서이면이 안양면으로 개칭돼 쓰였다.
‘안양(安養)’은 불교에서 마음을 편하게 하고 몸을 쉬게 하는 극락정토의 세계로 괴로움 없는 자유롭고 아늑한 이상향을 뜻한다.
지난 1973년 7월1일 시로 승격됐으며 지난 1992년 10월 만안구와 동안구 등이 설치됐다.
(사진 위) 1980년대 평촌 들녁
(사진 가운데) 1960년대 흥안로
(사진 아래) 1977년 수해를 당한 안양대교
● 역사 속 인물
< 과 거 >
이 고장 출신 인물로 원효대사(617∼686년)를 꼽을 수 있다. 안양에 첫발을 디딘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모사지’에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의상·윤필과 함께 삼막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미뤄 문무왕 연간으로 추정된다. 현재 삼막사 뒤에는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굴이 남아 있다. 원효대사와 연관 있는 사찰로는 ‘기아의 집’ 뒤에 수도사가 있다. 이 사찰 역시 의상·윤필과 함께 창사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로 들어와선 나옹화상(1320∼1376년)이 있다. ‘삼막사지’에 “…나옹화상이 충목왕 4년(1348년) 이 절에 주석하게 된다. 그는 그 전해 원으로 들어갔었던 태고보우국사와 같은 해 귀국, 숨 돌릴 겨를마저 없이 삼막사에 이르게 된 셈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1348년은 나옹화상이 이미 전해(1347년) 원나라 연경에 들어가 고려에는 없었던 만큼 ‘삼막사지’ 기록은 연대상의 오차로 보인다. 조선 말기 발간된 읍지나 지리지 등에 스승 지공과 제자 무학이 삼성산에 올라 성인 3명이 수도했다는 의미로 삼성산이라고 불리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조선 후기 최경환 선생(1805~1839년)도 이 고장이 배출했다. 성인으로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선생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전국을 떠돌다 안양9동 후두미동(병목안)에 정착했다. 이후 1839년 7월 기해사옥이 일어나 체포된 뒤 모진 형벌로 같은 해 9월 옥사했다. 감옥 안에서 최경환 선생은 천주교를 버리라는 회유와 고문 등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유해는 양화진 성당으로 옮겨졌고 병목안 성지에는 봉분과 기념비 등이 남아 있다. 지난 1984년 순교한 지 145년이 지나 한국천주교 200주년 신앙대회에 참석한 교황 요한 바오로2세에 의해 성인으로 선포됐다.
의학자이자 사회사업가인 오긍선 선생(1878~1963년)은 1905년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대에 입학, 피부비뇨기과를 전공, 졸업과 동시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12년 세브란스 의전(오늘날 연세대 의대)의 첫 한국인 교직원이 됐으며 부교장까지 지냈다. 1919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경성보육원을 설립했고 이 고아원을 1930년대 만안구 안양2동으로 옮기면서 1954년 기독보육원으로 개칭했다. 기독보육원은 지난 1998년 3월 지금의 해관보육원으로 명칭을 바꿨다.
독립운동가인 원태우 선생(1882~1950년)도 이 고장 출신이다. 망국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기로 마음 먹고 수원에서 올라오는 이토 히로부미가 탄 열차를 안양 육교 아래에서 전복시키려다 미수에 그친다. 이에 열차에 돌을 던져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다. 현장에서 체포돼 철도방해죄 명목으로 징역 2개월과 곤장 100대에 처해져 수감됐다. 석방된 뒤 일본 경찰의 감시 속에 석공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원태우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중 동안구 수푸루지(현 비산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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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 심재철·이종걸·이석현 의원 등
재계 전재준…‘신궁’ 김수녕 향토에 정착
< 현 재 >
관악산·수리산·삼성산 품에 안긴 풍요로운 도시답게 각계각층에서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중앙 정계에는 심재철 국회의원(한나라당)과 이종걸 국회의원(민주당), 이석현 국회의원(민주당) 등이 이 고장을 대표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비록 이곳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30년 이상 동안 안양에서 생활하고 있어 누구보다 애향심이 깊다.
지역 정가에선 장경순 경기도의회 부의장, 이성환 도의원, 이천우 도의원, 박광진 도의원, 임영신 도의원, 정기열 도의원 등이 외연을 넓히고 있다.
법조계에는 최영식 변호사(안양시 향우협의회장)가 안양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각 지역 향우회들을 통합, 협의회를 구성하는 등 시민들의 역량을 결집시키고 있다.
재계에는 안양시에 공원부지 수만 평을 무상으로 기증한 전재준 삼덕펄프 회장이 있다. 전 회장은 아름다운 기부 문화를 몸소 실천해 귀감을 사고 있다.
김수녕 전 국가대표 양궁 금메달리스트도 이 고장에 정착한 ‘안양인’이다. 장수민 한국권투협회 부회장, 박복만 안양태권도협회장 등도 체육계에서 안양의 맥을 잇고 있다.
/안양=이학성기자 hslee@kg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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