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흥렬 탄생 100년을 즈음하여

2009년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도 여기저기 가는 곳마다 하이든의 서거 200주년라며 난리들이고 멘델스존이 태어난 지 200년이 되었다고 법석들이다. 게다가 헨델이 세상을 떠난 지 250년이 되었다면서 이것 또한 그냥은 지나치기 힘든 모양이다. 그런데 정작 이 땅에서 태어나 우리 곁에서 살다 간 작곡가 이흥렬 선생의 탄생 100주년이 바로 올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선생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까지 우리 음악계를 이끌어 간 선구자이며 ‘꽃구름 속에’와 ‘바위고개’를 비롯한 많은 가곡들을 남긴 국민 작곡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서 지워지지 않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노래 ‘섬 집 아기’를 남기신 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선생이 우러러 보이는 것은 그 후손이 3대에 이르기까지 선대의 위업을 굳건하게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아들 이영조와 이영수가 이미 작곡가로서 우리 음악계를 이끌어가고 있고 이영조의 아들 이철주가 또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로 시작하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1장은 언제 읽어도 가슴이 뭉클하다. 얼핏 보기에는 아브라함에서 비롯하여 예수까지 이어지는 한 집안의 족보를 그저 나열한 것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이렇듯 단절 없이 대를 물리면서 완성해간 말씀과 믿음의 역사가 숨어 있는 셈이고 그 우여곡절이야말로 기적이고 희망이며 또한 보람이자 긍지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지키고 이어간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기도 하다. 중요하다면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힘든 일이라면 피하고 보자는 것이 우리네 심사라는 것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것이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다음에는 아무도 나서질 않는 것이 지금의 세태다. 뜻하는 바가 있어 아비가 자신의 업을 물리려 해도 아들이 이를 따르지 않고 혹시 아들이 아비의 뜻을 받들려고 해도 어미가 이를 가만 두지 않는다. 이렇다 보니 전통이란 걸 세울 수가 없고 신뢰라는 걸 찾을 수가 없다. 무릇 모든 것이 가정에서 비롯되거늘 가정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사회에서 보일 리가 없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갈등과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고 이를 뒷받침할 만한 전통이 없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요즈음 무대에서 살겠다고 고집하는 여식이 무척이나 고민스럽다. 혹시나 그럴까 싶어 함께 공연 보는 재미까지도 포기했었는데 대학 입시를 코앞에 둔 지금에 와서 요지부동의 결심을 굳히고야 말았다. 성악가이셨던 엄친 또한 노래를 하겠다는 아들을 끝내 말리셨다. 그래서 전혀 딴 길을 걷는 줄 알았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결국은 음악과 그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듯 스스로의 사연이 있기에 망설임 없이 대를 이어가는 집안이 예사롭게 보이질 않는다. 하물며 그것이 한 세대를 넘고 또 한 세대를 더한 대물림이라면 축복과 기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작곡가 이흥렬 선생이 이 땅에 오신 지 올해로 꼭 100년이 됐다. 선생은 이미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그 아들이, 또 그 손자가 선생의 뒤를 따르고 있다. 바라건대 손자의 아들이,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 손자의 손자까지도 선생의 뒤를 이어갔으면 한다. 그래서 또 한 100년이 지나고 다시 200년이 더 지났을 즈음에 그 집안의 누군가가 탄생 200주년이라고, 아니면 서거 200주년이라고 지구촌이 온통 호들갑을 떨었으면 소원이 없겠다. /홍승찬 예술의전당 예술감독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