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247주기 제향, 100년만에 복원한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효행문화의 백미다. 효찰대본산 용주사와 경기문화연대가 지난 13일(음력 5월21일) 오전 11시, 용주사 대웅전 앞에서 이 제향을 장대히 봉행하였다. 일반 시민과 지방관아 인사 등 300여명이 봉행을 함께 했다. 조선 왕조 마지막 이석(李錫) 세손은 제향이 거행된 한 시간 남짓 동안을 내내 두손 모아 합장하고 있었다.
하늘도 아시는 것일까, 그토록 쏟아붓던 장맛비가 뚝 그쳤다. 구름을 드리워 시원한 천연 그늘막을 쳐주었다. 올핸 사도세자의 능침인 융릉을 포함한 조선 왕릉 40기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한층 더 뜻깊었다.
제향은 국보 120호 용주사 범종의 은은한 명종(鳴鍾)으로 시작됐다. ‘혼정신성 다하지 못한 어버이 사모하여 / 오늘 또 화성을 찾아와 보니 / 원침엔 가랑비 부슬부슬 내리고 / 재전에서 배회하는 그리운 마음 깊구나’ 1796년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하며 지은 한문시 풀이다. 아드님 임금은 또 이렇게 아버질 기렸다. ‘사흘 밤 견디기는 어려웠으나 / 그래도 초상화 한 폭은 이루었다네 / 지지대 돌아가는 길에 머리 들어 / 벽오동 같은 구름 바라보니 속마음 일어나누나’
여섯 분의 스님이다. 스님들의 청아한 청혼독경이 대웅전 인근의 구릉이며 송림을 넘어 능침이 계신 곳으로 울려 퍼졌다. 호걸풍이셨던 사도세자다. 마침내 세자 저하가 사냥길에서 활을 어깨에 맨 채 제향을 흠향키 위해 들어서시는 듯 했다. 아마 융릉에 합장된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건릉에 합장된 정조대왕과 효의왕후 일가분들께서 모두 기뻐하셨으리라.
추모곡은 어이 그토록 또 애를 끓는 듯 하는 지, 대금 장고 등의 합주는 붕당(朋黨)에 희생된 사도세자의 비운, 그리고 아드님 임금의 불세출의 효심을 사실적(寫實的) 음율로 자아내는 것이었다. 행렬이 줄을 이었다. 시민들의 참배가 좀처럼 그치질 않았다. 제단에 나아가 부복, 잔을 바치며 큰절을 올리는 모습들이 한결같이 경건했다.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은 그 아버지에 그 아드님이셨다. 아드님 임금의 활달한 기품은 아버질 닮았다. 조선 왕조 전기의 세종 임금에 버금가는 후기의 정조 임금이다. 민본주의적 계몽군주 면모나, 실학적 개혁사상은 아마 아버지가 못다편 유지라고도 여겼을 것이다.
현대적 의미가 갖는 사도세자의 상고(尙考)는 붕당정치의 폐해다. 조선 왕조의 당파가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부정적으로 일관한 사관(史觀)은 일제의 식민지사관이다. 원래는 왕조의 정당정치였던 게 동인(東人) 서인(西人) 등 당파다. 그런데 이것이 붕당으로 전락돼 참극을 가져온 것이 사도세자의 희생이다. 오늘의 민주주의 정당이라는 정당이 왕조의 당파 정당보다 더 나은지, 아니면 왕조의 붕당과 마찬가진 지 생각해볼만 하다.
또 하나의 의미는 효 문화다. 한 나라의 군주가 아버지에게 정조 임금처럼 효를 다한 군주는 어느 나라 역사에도 없다. 물론 이엔 특수 배경인 사도세자의 비운이 있긴하지만, 아버지의 능침을 배알하고 용주사를 세우고 ‘부모은중경’ 등을 친히 짓는 등 아드님의 효행은 다 댈수 없을만큼 끝이 없고 깊었다. 효가 인류생활에 영원한 불변의 가치라면, 사도세자와 아드님 임금 간에 얽힌 효 문화는 가히 세계적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다. 융·건릉 주변이 마구 훼손돼 간다. 도대체 ‘태안3지구개발’이 뭔지, 세계적인 효행 유적지 보존이 위협받고 있다. 이곳 아니면 대단위 아파트단지 부지가 없단 말인가, 물질문명에 치우친 정신문화의 피폐는 야만인이나 할 짓이다. 여기 저기에 마구 파헤쳐진 흉한 상처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사도세자와 정조 임금을 말하기가 무척 송구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제향을 통해 정조대왕의 효심이 중생의 마음에 푸르게 살아나 부모님의 소중한 은혜를 아는 삶을 발원한다”는 것은 용주사 주지 정호 스님의 봉행사다. 문석창 경기문화연대 공동대표는 “아드님의 지극한 효심의 성역을 지켜드리겠다”고 말했다.
제향을 마치고는 중요무형문화재 50호 범패(梵唄) 영산재가 봉원사 현성 스님 등 여섯 분에 의해 이어졌다. 세자 저하시여! 어여삐 여겨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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