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업적
민주화 투쟁, 인권 신장, 남북통일 운동, 노벨평화상 수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굵직한 인생을 대변해 주는 용어들이다.
북한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해방 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며 남북 관계 개선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재임 기간동안 6·25 전쟁 이후 최고의 국난이었던 외환위기를 극복한 경제 대통령이자 예술과 스포츠를 사랑한 문화대통령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곧 통일을 향한 여정이었다.
유신 때부터 ‘빨갱이’로 몰려 수차례 고초를 겪기도 했지만 그는 3단계 통일론과 대북 포용 정책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고 마침내 남북 화해협력 시대를 여는 등 통일운동에 평생을 투신했다.
일각에서는 ‘대북 퍼주기’라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는 집권기간 끝까지 이 신념을 고수했다.
김 전 대통령은 햇볕정책에 대해 “북에 의한 적화 통일도 용납하지 않지만 남에 의한 북한의 흡수통일도 기도하지 않는다”며 “남북이 오로지 평화적으로 공존하고 평화적으로 교류 협력하자”고 북을 설득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서로 안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의 이 지론은 결국 철통같던 북한의 마음을 움직였고 지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됐다. 분단 50년만의 일이었다.
남한의 대통령 김대중과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얼싸안는 모습에 전세계가 열광했다.
이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했다’며 그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김 전 대통령을 선정했다.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된 것이다.
◇IMF를 해결한 경제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2월 외환위기 당시 취임해 뚝심으로 국가 부도 위기를 해결한 경제 대통령이었다.
특히 IMF 당시 김 전 대통령이 단행한 기업 구조조정과 금융권 건전화는 지난해 9월 전 세계에 몰아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한국이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버팀목이 됐다.
또 그의 ‘민주적 시장경제 원리’는 한국 사회가 자율 경쟁과 시장 경제로 진화하는 발판을 마련해줬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당면한 경제위기를 ‘시장경제 논리와 공정경쟁 원리의 실종’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고 정부 주도의 경제 개발을 지양했다.
또 경제운용에 따른 폐해와 비효율성을 제거하려면 경제정책을 민간주도형으로 펴나가야 하며 이를 통해 공정경쟁 질서를 확립하고 소득재분배를 실현해 물가를 안정시켜야 한다는 철학 아래 경제 정책을 운용했다.
그 결과 외환 위기로 1997년 말 39억달러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를 재임 마지막 해인 2002년 말 1천214억달러로 늘림으로써 국가부도 위기를 해소하는 성과를 거뒀다.
◇대한민국을 IT 강국으로
김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I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초석을 놓았던 지도자였다.
초고속인터넷 등 유무선 통신망을 구축함으로써 대한민국을 굴뚝 산업 중심에서 지식정보화 강국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라는 것.
김 전 대통령은 1998년 취임 당시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하겠다”며 IT강국 의지를 피력했다.
실제로 그는 임기 내내 IT를 통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데 역량을 쏟아부었다.
이에 취임 첫해인 1998년 6월 시작한 초고속 인터넷서비스 가입자가 불과 4년만에 1천만명을 넘어서면서 인터넷이 생활화되는 등 IT 붐이 조성됐다.
◇문화·체육을 사랑한 대통령
책을 사랑한 대통령이었던 만큼 김 전 대통령의 문화 사랑도 남달랐다. 무엇보다 현재 문화정책의 큰 틀과 기본이 마련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정책이란 이름에 걸맞는 문화비전이 처음으로 제시됐으며 문화가 산업으로 새롭게 옷을 입기 시작한 것도 이 때다.
문화산업진흥기본법 제정 등으로 문화산업 집중 육성과 문화콘텐츠 산업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바탕을 마련했다. 2000년 정부예산대비 문화예산 1%, 1조원대 확충과 문화재청 출범, 한국문학번역원 설립, 문화예술진흥기금 조성 확대 등 문화예술진흥과 문화복지의 기틀을 마련했다.
또 한국체육사에 미친 가장 큰 업적으로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막식에 남북한 동시입장을 성사시킨 것이다.
/최모란기자 moranl@kgib.co.kr
■DJ 어록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현미경처럼 치밀하게 보고 망원경처럼 멀리 봐야 한다”.
▲“정치는 살아 꿈틀거리는 생물과도 같다”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며,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3선 개헌은 이 나라 민주국가를 완전히 1인독재 국가로 만들어 국체를 변혁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적은 공산 좌익독재 뿐 아니라 우익독재도 똑같다.”
▲“4·19는 5·16의 안티 테제다.”
▲“이제 저에 대한 모든 평가를 역사에 맡기고 평범한 한 사람의 시민이 되겠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을 둘이나 잡아넣을 정도로 용기있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런 건 못한다.”
▲“이 땅에 차별로 인한 대립이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
▲“햇볕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감싸기도 하지만 음지에 있는 약한 균들을 죽이는 것도 햇볕이다.”
▲“나도 실업계 고등학교 나왔어요. 실력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해야지, 학교를 가지고 차별하면 안된다.”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평양) 방문길에 오르고자 한다.”(2000년 6월13일 서울출발 평양행 대국민 인사말에서)
▲“여러분이 보고싶어 이곳에 왔다.”(2000년 6월13일, 평양 도착성명에서)
▲“촛불집회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인터넷·휴대전화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된 중대 변화.”
■ 막 내린 3金시대
반세기 가까이 한국정치를 움직여온 3김(金) 시대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막을 내렸다.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와 함께 3김 중 한명이자, 정계은퇴 후에도 유일하게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했던 김 전 대통령이 서거로 196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를 좌지우지했던 시대가 마감되고 있는 것.
이들은 때로는 동지로서 손을 맞잡았고, 때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극한 대립의 정치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애증(愛憎)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치 9단’의 칭호는 이들 3김에게만 허락된다.
그만큼 3김이 한국 정치사에 남긴 족적과 폐단은 깊고도 넓다는 의미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친 뒤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서 경쟁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한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암흑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힘은 3김에게 다시 정치활동의 공간을 만들어줬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된 것이다.
DJ와 YS는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 나란히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합당과 분열 등을 거듭하면서도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됐고,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으로 3김 정치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YS와 JP는 집권여당인 민자당 총재와 대표 최고위원으로 협력관계를 맺었지만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해 3월 충청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역시 호남을 지역기반으로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번의 승부였다.
YS에게 쫓겨난 JP는 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가 내민 손을 잡았다. 이른바 ‘DJP 연합’을 통해 야권후보 단일화를 이뤄낸 것.
이에 따라 DJ는 대권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고, JP는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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