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는 광복으로는 64년, 건국으로는 61년이 된다. 이 가운데 50년 안팎의 현대 정치사에 줄곧 직간접으로 얽힌 세 명의 정치인이 있다. 김대중(DJ), 김영삼(YS), 김종필(JP) 등 이른바 ‘3김’이다. DJ는 1961년 제5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신했다. YS는 1954년 약관 25세에 제3대 국회의원이 됐다. JP는 1961년 박정희가 이끈 5·16 군사정변의 2인자로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의 권한은 서슬이 시퍼랬다. 모든 정치 기획이 그의 손에서 주물럭거려졌다. 국회가 해산당한 YS와 DJ는 구 정치인으로 매도됐다.
제3공화국의 박정희 정권, 제4공화국의 유신정권은 DJ와 YS의 민주화운동 1·2기 투쟁기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 선포는 이들 두 민주화운동이 두려워 탄압하고, 영향력을 희석시키기 위한 비상 조치였다. 1980년 전두환·노태우 주축의 신군부 출현에 이은 제5공화국은 DJ와 YS, YS와 DJ의 민주화운동 3기 투쟁기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적과 동지가 무상해진다. 민추협의 공동의장이던 DJ와 YS가 YS는 신민당, DJ는 평민당 대통령 후보로 각기 독자 출마,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당선을 안기면서 숙적이 된다. 이어 YS는 옛 정적인 JP·노태우와의 3당 합당으로 제14대 대통령이 됐다. DJ 또한 JP와 손잡는 DJP 연대로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군사정변 때 DJ를 억압했던 JP가 괄시받았던 DJ 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냈다.
3김의 은원 관계는 긍정적으로 보든, 부정적으로 보든 부인될 수 없는 한국 정치의 현대사다. 이 가운데 DJ가 타계했다. 일세의 풍운아다. 국내외 애도의 물결이 줄을 잇고 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신군부 시절에 핍박받았던 YS는 대통령일 때, 전두환·노태우를 감옥에 보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신군부 시절 사형 선고를 받게한 DJ를 병문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통령일 때, 전직(대통령)이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YS는 오랜 동지이면서, 오랜 정적이었던 DJ 병실을 찾아 “이젠 화해할 때가 됐다”고 애증어린 소회를 밝혔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기관지 수술로 말을 제대로 못하는 몸으로 강원도 용평서 요양 중이다. JP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
‘3김정치’는 일찍이 YS·JP 양김의 정치 폐업으로 사실상 끝났었다. 다만 DJ만이 좌장격의 훈수가 있어왔다. 한데, 이마저 사라졌다. ‘3김정치’가 완전히 종식된 것이다. ‘3김정치’는 보스 정치다. 또한 지역 패권주의다. 지역감정의 골을 키웠다. 영호남의 동서 분열로도 모자라, 충청 등 지역정서를 갈래갈래 갈라놨다. 남북이 분단됐다. 우린 분단국가다. 그런데 이에 분열국가까지 겹쳤다. 분단 못지않게 무서운 것이 분열이다.
DJ의 영욕은 극명하다. 대통령 재임 때만 해도 아들들과 관련된 갖가지 권력형 비리가 무성했다. 정보기관의 무차별 불법 도청 사실이 드러나 민주주의와 인권 중시의 이미지에 흠집을 냈다. 언론사에 대한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강행, 언론 탄압 시도의 의혹을 사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관 등이 연관된 옷로비 사건 등은 도덕성을 먹칠했다. 측근 연루의 각종 부패와 더불어 대북 비밀송금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DJ는 역시 위대하다. 정치 입문 43년, 대권 도전 27년만에 대통령에 오른 3전4기, 좌절을 거부한 오뚝이 의지만이 아니다. IMF 외환 위기를 집권 1년 반 만에 극복해낸 리더십만도 아니다. 남북 관계의 새 지평을 열어서만도 아니다. 자신의 신변에 안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있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이다. 가택연금 55회, 감옥살이 6년, 망명 2회, 사형선고 등을 받은 정치인은 DJ 말고는 없다.
그러나 이젠 그런 민주화 투쟁의 시대는 갔다. DJ 스타일의 정치 모델은 DJ 시대로 끝났다. 지금은 화해 협력의 시대다. 생각이 달라 서로 얼굴을 붉히며 다퉈도, 협력의 틀에서 다퉈야 된다. DJ 정신의 계승은 전근대적 투쟁이 아니다. 김정일과도 화해하자는 판에 우리끼리 못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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