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홍일(61)씨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홍일·홍업·홍걸) 중 장남이다. 경희대 정치학과 출신인 그는 아버지의 정치적인 굴곡을 그대로 뒤따랐다. 아버지가 대선에 출마, 박정희 전 대통령에 맞섰던 1971년엔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고초를 겪었고, 19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80년 결성된 30만명 회원 규모의 청년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민청)를 실질적으로 이끌면서 국민의 정부 탄생을 외곽에서 도왔다.
문단(文壇)에 후일 알려진 사실이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경희대 동문 윤채한 시인이 발행하던 계간 문예지 ‘우리문학’을 후원했다. ‘우리문학’은 역량있는 신인들을 발굴, 문단에 소개하면서 ‘우리문학상’과 ‘후광문학상’을 제정, 한국문학발전에 이바지했다.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세 아들은 야당 지도자의 아들에서 ‘대통령의 아들’로 신분이 바뀌었지만, 주위에서 가만두지 않았다. 1996년 권노갑 전 의원의 양보로 16대 때 목포·무안갑에서 금배지를 단 홍일씨는 17대 의원 시절인 2003년 ‘나라종금 로비’ 수사 과정에서 돈을 수수한 혐의가 드러나 불구속 기소되는 불운을 겪었다. 설상가상으로 50대 중반 파키슨병이 발병, 공개석상에 거의 나타나지 않은 채 투병생활을 해 왔다. 병인은 대부분이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한다.
이희호 여사도 자서전에서 공군 중위로 병역을 마칠 정도로 건강했던 홍일씨가 1980년 부친의 내란음모 혐의를 허위자백하지 않으려다 고문을 받았고, 고통을 못 이겨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17대 의원 시절 몸이 다소 불편했지만 별 문제 없이 의정활동을 마쳤다. 당시 살이 찐 넉넉한 풍채였다. 하지만 세브란스 병원에 휠체어를 탄 채 나타난 그의 모습은 몰라보게 수척해졌다. 행동 및 언어 장애로 거의 말을 하지 못한 그가 아버지 운명 직전 힘겹게 입을 떼 한 음절씩 “아, 버, 지”라고 불렀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에 자신으로 인해 병을 얻은 장남에게 평생 마음의 빚을 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력을 다해 “아, 버, 지”를 부른 홍일씨의 ‘삶’이 실로 안타깝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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