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할 수 없는 것들

서울 시향의 상임지휘자로 있다가 우리나라에서 병사한 러시아 지휘자 마르크 에름레르(Mark Ermler)에게서 몇 년 전 들은 이야기다. 푸쉬킨의 작품은 절대로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자 불현듯 러시아어를 배워 내가 이전에 번역으로 읽었던 이 대천재의 작품들을 원어로 읽고 싶어졌다.

따지고 보면 모든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라고도 한다. 문학작품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산문의 경우도 외교문서나 국제 계약서 등 문구 하나의 번역에 절대적으로 신경써야 할 일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번역이 없다면 다른 언어권의 문화는 전달되지 못한다. 번역이 많은 뉘앙스를 잃고 의미의 변질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번역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을 부정할 수 없다.

문학작품의 경우처럼 공연에서도 번역문제는 작품전달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또 문학작품에서 시와 산문의 경우가 다르듯이 공연에서도 장르마다 번역의 전달 기능에 차이가 있다. 독일가곡처럼 깊이있는 장르는 아마 푸쉬킨의 번역과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독일 서정시를 번역해서 자막으로 내보내 보았자 그 시의 원래 가치를 음악으로 표현한 노래를 이해하는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어권 밖에서 하는 독일가곡 리사이틀은 가장 엘리트적인 공연 장르라고 하겠다. 오페라의 경우는 근래 자막기 덕을 많이 보고 있다. 과거에는 오페라 번역이 크나큰 문젯거리였다. 오리지널 언어에 맞춰 작곡된 음악을 그대로 두고 그 음악에 번역문을 맞추려면 음절 수의 문제를 넘어 엄청난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는 번역 불가능의 경우이지만 그래도 대중을 상대로 하는 장르이니 번역은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우리나라에서도 약 20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점점 글로벌 시대가 되면서 출연진이나 관객이나 본국인과 외국인이 뒤섞이게 되니 번역 공연의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오페라의 의미 전달에서 텍스트는 사실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자막기는 이 일부의 이해를 도우면서 원모습을 훼손하지 않게 하는 긍정적인 결과를 준 케이스다. 연극의 경우는 여전히 번역을 할 수밖에 없다. 가끔 외국 연극단체의 공연도 있고 외국영화를 자막으로 이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연극을 자막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페라의 경우와 달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근까지 외국 것의 우리말 번역에 주력해 왔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면서 우리 것을 외국에 알려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우리 것의 외국어 번역이 많아지고 있다. 어찌보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가는 속도에 우리 것의 번역에 대한 대책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외국에서 만나는 우리 것에 대한 정보는 가령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여전히 엄청나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작가들 중에는 분명 외국어로 번역하기 좋게 의도적인 문체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여기에 작가 정신이 투철하게 담겨있으면 되니까 이런 스타일을 ‘불순’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작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작가들은 아무래도 푸쉬킨처럼 번역 불가능한 경우보다 가치를 인정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 문학 작품 중에서 제목까지도 번역하기 힘든 고 이문구의 작품을 가장 좋아한다. 그리고 푸쉬킨이 외국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이문구의 작품을 읽기 위해 외국인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것을 세련된 번역을 통해서 가능한 한 많이 세계에 퍼뜨리는 작업에 힘쓰는 한편으로 문학작품뿐 아니라 우리 문화 전반에서 ‘번역할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만들어 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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