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소원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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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 / 꿈에도 소원은 통일 / 이 정성 다해서 통일 / 통일을 이루자 / 이 겨레 살리는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통일이여 어서 오라 / 통일이여 오라”

 

‘우리의 소원’은 처음엔 어린이극용 합창곡이었다. 1947년 KBS의 전신 서울중앙방송의 의뢰로 삽화가이자 극작가인 안석주(1950년 작고) 선생이 노랫말을 지었다. 안 선생은 그때 3·1절 기념 라디오 준비극을 맡았다. 안 선생은 자신이 작사한 노랫말을 서울대 음대 재학생인 아들에게 작곡을 맡겼다. 아들은 늘 다니던 교회에서 기도를 하던 중 문득 떠오른 멜로디를 놓치지 않고 오선지에 옮겼다. ‘우리의 소원은 독립’이 세상에 빛을 본 순간이었다.

 

반응은 대단했다. 전파를 타자마자 각 지방에서 연주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엔 ‘우리의 소원은 통일’로 당시 문교부에 의해 개사돼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다. 그리고 40년 세월이 흘렀다. 1989년 북한 평양에서 열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임수경씨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민족의 노래’가 됐다. 북한에선 이 노래를 그쪽의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임수경씨 방북 후 남한 사람 작품인 것을 알고 북한도 ‘우리의 소원’ 같은 노래를 만들기 위해 두 번이나 공모를 했다고 한다.

 

‘우리의 소원’을 작곡한 그 음대생이 안병원 옹이다. 지금 83세다. 그는 국내 최초 어린이 노래단 ‘봉선화 동요회’를 만들었고, 1954년 한국어린이 음악사절단을 이끌며 미국 43개주를 돌았다. ‘구슬비’ ‘나 혼자서’ ‘푸른 바람’ 등 주옥 같은 동요 300여 곡을 만들었다.

 

임수경 씨가 평양에서 ‘우리의 소원’을 부른 후 북한은 그에게 3번이나 이 노래 지휘를 요청했지만 이산가족들의 한을 푼 뒤 방북하겠다며 고사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이 손을 맞잡고 ‘우리의 소원’을 부르는 모습을 TV로 본 그는 2001년 4월 평양에서 열린 제19차 ‘4월의 봄’ 친선 예술축전에 참가하면서 드디어 북한 땅을 밟았다. 그때 ‘우리의 소원’을 지휘했다.

 

“(통일이 되어) 이 노래가 그만 불리는 날이 빨리 와야한다”는 안병원 옹은 지금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며칠 전 서울을 다녀갔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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