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파병

임병호 논설위원 bh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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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해외 파병 논의는 대략 15차례 있었다. 첫 파병 요청이 들어 온 것은 세종 때다. 명은 당시 몽골 정벌을 준비 중이니 10만 병력을 요동에 파병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왜나 여진이 그 틈을 노릴지 모른다. 조선 강토를 굳건히 지켜 번국(藩國)의 도리를 다하겠다”며 완곡하게 거절했다.

 

누구도 청병에 응하자는 의견을 내지 않았다. ‘사대’라는 것을 그저 대국으로 섬기는 것으로 이해했다. 세조 때 신료들은 파병 찬성 일변도였지만 국익을 따진 결과였다. 명의 청병 요청과는 별개로 조선은 독자적으로 건주여진(建州女眞·남만주 지역 여진)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명의 요청을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익 우선 기조는 성종 대에도 이어졌다.

 

1479년 명은 건주여진을 다시 치고자 하니 조선군이 퇴로를 차단하라는 칙서를 내렸다. 조정은 찬반으로 갈라졌다. 찬성 쪽은 “대국을 섬기는 예의상 거절하기 어렵고, 세조 때 출병 전례가 있다”고 했고, 반대 쪽은 “평안도에 흉년이 들었고, 겨울이라는 시기 문제가 있다”며 맞섰다. 승문원참교 정효종은 “우리 백성을 창칼 사이로 나아가게 해 타국의 이익을 도와주겠습니까”라는 상소를 올렸다. 대명사대(對明事大)와 조선의 국익은 언제라도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파병 논쟁이 가장 격렬한 때는 광해군 시기다. 파병 요청은 모두 4번이었다. 비변사를 필두로 거의 모든 신료가 찬성론을 펴고, 광해군 홀로 반대하는 형세였다. 광해군의 반대 이유는 조선 초기 때처럼 국제 정세와 실익을 따졌기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후금 정벌 계획이 실패할 것으로 예측했다.

 

광해군은 파병 요청이 담긴 칙서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대명사대 원칙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신료들이 보기엔 번국의 왕이 황제 명을 거부하는 것은 항명이자 패륜 행위와 다름 없었다.

 

지금 한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아프가니스탄 재파병을 결정한 상태다. 국군의 해외 파병은 헌법 60조 2항에 따라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파병동의안은 재적의원 과반수 출석에 과반수 이상 찬성으로 통과된다. 총의석 299석 가운데 169석(56.5%)을 차지하는 한나라당이 당론으로 파병을 찬성할 경우 민주당이 반대하든 말든 국회 통과는 확실하다. 국익을 위하여 ‘NO’라고도 말할줄 알았던 조선의 해외파병 역사를 상고해 볼 시점이다./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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