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위하지 않는단 정치세력은 없다. 독일 나치스 정권도 ‘위대한 독일 국민을 위한다’고 했다. 평양정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 인민의 리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헌법 1조)라고 한다. 18세기의 민약설은 주권재민을 말하며, 목민심서는 위민을 치도의 근본으로 삼았다.
민중은 피지배층인 국민 대중과 같지만 계급의식이 담긴 점에선 구별된다. 민중은 또 ‘민서’라고도 하여 서민과 같지만 정치색이 담긴 점에서 서민과 다르다. 민중은 소시민을 포함한다. 의식면은 중류 이상의 자본가층에 가까우나, 경제면은 중류 이하인 노동자층의 무산계급이 소시민이다. 국민 중에도 특히 민중을 위한다는 정치세력이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이다.
이런 진보주의자들은 정치운동권에도 있고, 노동운동권에도 있고, 시민운동권에도 있다. 이미 또아리를 튼지가 오래다. 지난 10년동안 정권도 잡았었다. 진보주의 정권에선 권력을 무소불위로 설쳐 국가사회를 혼란케하더니, 정권을 잃고나선 폭력으로 국가사회를 뒤흔든다. 이들 정치운동권 세력은 국회의사당을 때려 부수고도 모자라 길거리 선전선동을 일삼고, 노동운동권 세력은 불법파업을 일삼고, 시민운동권 세력은 어거지 주장을 일삼는다.
이들이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것 가운데 하나가 소위 행동하는 양심과 표현의 자유다. 표현의 자유 등은 사회계약설이 지닌 저항권이다. 국가 구성원은 자유권 행사를 국가에 유보하는 반면에 국가가 생명과 재산권 등 보호를 소홀히 하면 혁명권을 갖는다는 것이 사회계약설이다.
지금 진보주의자들이 사사건건 일으키는 국가사회의 소요 책동은 사실상 혁명의 획책이다. 그들은 사회계약설을 자의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오히려 자유를 누리다 못해 남용하는 것이 저들이다. 국가에 법률로 유보한 자유를 되찾아야 하는 혁명의 시기도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공공의 질서와 선량한 풍속의 보호에 우선 할 수 없는데도, 이를 우기는 것은 공공사회의 파괴다. 이같은 기조에서 움직이는 행동하는 양심이란 사회적 가면으로 위장된 집단이익이다. 정치운동권이 그렇고, 노동운동권이 그렇고, 시민운동권이 그렇다.
노동운동권의 예를 든다. 언론인 남시욱씨가 쓴 ‘한국진보세력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현재의 노조 대부분은 1천500만 노동자 중 극소수에 불과한 상대적으로 부유한 근로자들이다. (1천500만 노동자의) 그 10%도 대개가 정부기관, 공기업, 대기업, 은행, 교사, 언론, 병원 등 고액봉급을 받는 기득권 집단이다’라고 했다. (이들 귀족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다) 또 진보세력이(사실상) 소외계층 문제를 비롯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소홀한 원인은 과거의 타성에 젖어 통일문제 등 이념과 민족문제에만 계속 매달리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민중운동을 한다는 정치운동권, 노동운동권, 시민운동권 사람들 거의가 유산계급이란 사실이다. 무산계급의 민중을 팔아 고대왕실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오래 전에 든 사례를 한 번 더 들겠다. 베트남의 호치민이 국부로 추앙받는 것은 그가 평생을 민중의 의식주생활과 같은 면모로 산데 대한 존경심 때문이다. 베트콩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서 미군의 첨단 무기에 살지 죽을지 모르고 대든 게 아니다. 자신과 똑같은 민중의 삶을 산 지도자 같으면 목숨을 바쳐도 된다는 충성심이 용트림쳤기 때문이다. 호치민박물관에는 그가 생전에 썼던 나무침대 등 검소했던 일상의 가재도구가 그대로 있다.
민중을 위한다는 그 많은 진보세력의 정치운동권, 노동운동권, 시민운동권에서 호치민 비슷한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아무리 보아도 없다.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극작가 입센의 희곡으로 ‘민중의 적’이란 게 있다. 민중을 위한 것처럼 꼬드긴 사람들이 곧 민중의 적이었다는 내용이다. 중우정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국가론’과 ‘정치학’에서 민주주의가 타락한 취약점에 붙인 말로, 근세에도 민주제의 허점을 비꼬는 투로 쓰였다. 진보주의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국내 진보세력은 이념적 선전선동의 중우정치로 민중위에 군림하는 집단이익의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임양은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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