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성이라 불리지 못한 구의동 보루

551년 겨울 이른 새벽, 한 무리의 백제군 선발대를 태운 배가 소리 없이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목적지는 한강 북안에 있는 고구려군의 전방 초소. 백제군이 보루 바로 아래에 다다를 때까지 보루에서는 아무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고구려 병사들. 백제군은 해발 50m의 야트막한 구릉을 기어 올라가 초소에 불을 질렀다. 나무 벽체와 갈대 지붕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초소 안에서 잠자고 있던 10명의 고구려 병사 중 몇 명은 불에 타서 죽었고, 바깥으로 뛰쳐나온 나머지 병사들도 기다리고 있던 백제군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로부터 1천400여 년이 지난 1977년 5월. 서울시가 성동구 화양동 일대에 대한 택지구획정리사업을 추진함에 따라 서울대학교 조사단은 말무덤이라 불리던 구의동 유적의 발굴을 시작했다. 강돌로 쌓은 원형 석축 시설과 수혈 주거지, 온돌 시설과 토광 유구가 확인됐다. 온돌아궁이에는 철제 솥이 걸려 있는 상태였고, 10자루의 창과 4자루의 도끼, 2자루의 환두대도 외에도 1천300여 점의 화살촉과 철제 보습, 가래, 쇠스랑 등이 출토됐으며, 400여 점에 달하는 토기도 출토됐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였지만 당시 조사단은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성인지 알지 못했다. 백제 고분이라는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했을 뿐 아니라 백제의 도읍지였던 한강변에서 고구려 유적이 발견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사단은 본 무덤을 쓰기 전에 만들었던 가묘 형태의 빈전장(殯殿葬)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백제 고분으로 결론을 내리게 됐다. 발굴조사 후 구의동 보루는 개발에 밀려서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20층짜리 아파트가 건립됐으며, 출토 유물은 20여 년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의 백제실에 전시되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이것이 고분이 아니라 군사시설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던 조사원 중 한 명이 학교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부터 30여 년 전 한국고고학의 현주소였다.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보루라는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980년대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밝혀지게 된다. 올림픽 관련 시설 설치 전 실시했던 발굴 과정에서 몽촌토성 출토 유물 중 상당수가 구의동 보루 출토 유물과 비슷했는데, 이들이 고구려 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고구려의 백제 한성 함락 기사가 사실이라는 것이 유물로 입증된 것이었다.

 

1994년 필자는 구리문화원의 요청으로 아차산에 대한 지표조사를 하게 됐다. 아차산 일대를 한 달 이상 계속 오르내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차산 4보루의 헬기장 바닥에 박혀 있던 몇 점의 고구려 토기가 눈에 띄었다. 이상하게도 그날 이후 마치 눈에서 허물이 벗어진 것 같이 가는 곳마다 고구려 토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구려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며 보낸 1994년의 봄과 여름의 그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일은 내가 고구려 고고학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됐으며, 이후 남한 지역에서 약 40여 개소가 넘는 고구려 보루를 찾아내는 발판이 됐다.

 

인식의 틀은 거대한 장막처럼, 또는 눈을 덮는 허물처럼 진실을 가리는 것 같다. 발굴에 임할 때마다 또 다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한해의 역사를 마감하는 12월의 마지막 날에 내 눈을 가리고 있을 또 다른 장막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 문화재지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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