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올림픽 도전사는 1936년 독일 가르미슈에서 열린 제4회 동계올림픽에서 시작됐다. 그해 창립된 조선빙상경기연맹 소속으로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김정연이 1만m에서 18분2초7의 일본신기록으로 12위에 올랐다. 태극기를 달고 처음 올림픽에 도전한 것은 1948년 제5회 스위스 생모리츠대회였다. 6·25 전쟁으로 1952년 제6회 노르웨이 오슬로대회에 불참한 것을 제외하곤 올림픽의 문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하지만 한국은 20위권 진입조차 쉽지 않았다.
1970, 1980년대 빙속은 이영하와 배기태가 주도했지만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배기태는 세계선수권 500m에서 3차례 우승했지만, 올림픽에선 1988년 캘거리대회 남자 500m에서 36초90으로 5위를 기록한 게 최고였다. 사상 첫메달은 1992년 알베르빌대회에서 나왔다. 김윤만이 남자 1천m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이강석이 동메달을 따기까지 14년의 공백이 있었다.
이승훈이 지난 14일 5천m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장거리 메달리스트가 됐다. 이승훈의 은메달은 아시아 선수는 장거리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주었다. 이어 16일, 모태범이 드디어 금메달의 숙원을 풀었다. 1908년 국내에 처음 스케이팅이 보급된 이후 102년 만에, 태극마크 62년 만에 일궈낸 쾌거다. 모태범의 금메달은 체력과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이 단거리, 장거리 모두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스물한살 청년 모태범은 일곱살 때부터 부모의 권유로 취미 삼아 스케이트를 타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 골반을 크게 다치는 사고가 있었지만, 주니어 시절부터 꾸준히 국제경험을 쌓으며 한국 빙속을 이어나갈 기대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규혁, 이강석이라는 큰 산이 있었다. 그러나 밴쿠버에서 남자 500m 스피드스케이팅의 영웅이 됐다. 모태범은 “(국내에서)기자들이 나한테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언론에서 무관심한 게 오히려 부담을 덜어주고 큰 도움이 됐다”고 쾌활하게 말했다. 그 오기(傲氣), 실로 대단하다. 내친김에 1천m에서도 ‘하나 더’ 땄으면 좋겠다. /임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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