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가족부가 낙태 금지 캠페인을 벌인다. ‘생명의 편 의사회’는 낙태 시술을 한 의사를 고발한다. 작금의 이런 추세는 정답이 없는 낙태 논란을 또 한 번 생각하게 한다.
낙태 시술 의사를 고발하는 ‘생명의 편 의사회’ 생각은 태아의 생명체 존엄성을 무겁게 보는 것이다.
남매를 둔 주부가 세 번째 아이를 가져 낙태를 하기 위해 산부인과 의사를 찾았다. 의사는 화면 진찰에서 나타난 태아의 손발 모양을 보여주며, 이래도 떼겠느냐고 물었다. 화면 속 아이를 본 주부는 모성애가 발동해 차마 뗄 수가 없었다. 하마터면 세상 빛을 못 볼 뻔했던 셋째 아이가 이렇게 해서 태어나 이젠 중학생이다. 인성도 착하고 공부도 잘해 부모의 귀염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고 아찔하다”는 것은 그 주부의 말이다. 낙태를 말린 의사를 두고두고 고맙게 여기고 있다. 낙태 시술 고발은 이 점에선 이유가 훌륭하다.
그러나 출생이 숙명적으로 불행한 태아가 없지 않다. 미혼모 얘기가 아니다. 미혼모라고 해서 굳이 부끄러워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다. 여기서 출생이 숙명적으로 불행한 태아의 구체적 사례를 일일이 들 것 없이, 이의 대부분은 모자보건법상의 낙태 허용에 들지 않아 불법시술로 이어진다. 형법은 불법으로 낙태한 부녀는 1년 이하의 징역, 낙태를 도운 의사 등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낙태 금지로 인한 불행한 출생의 인생이다. 출생자만이 아니다. 그 어머니도 불행하긴 마찬가지다. 또 있다. 모자 당사자만도 아니다. 그들의 불행이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 또한 고려해야 된다.
낙태 금지와 관련, 대조되는 두 가지 현상이 있다. ‘피고인이 설혹 낙태행위가 가족계획의 국가시책에 순응한 행위라고 믿었다 하더라도, 국가 시책에 의한 가족계획은 어디까지나 임신을 사전에 방지하는 피임방법에 의한 것이고, 임신 후의 낙태행위를 용인함이 아니다’라는 것은 1965년 11월23일에 있었던 대법원 판례다. 정부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로 산아제한을 하던 때다. 이에 비해 작금의 보건복지가족부가 추진하는 낙태 금지 캠페인은 저출산 대책의 일환이다. 즉 산아제한과는 정반대 개념의 인구 증가를 위한 산아장려인 것이다.
한 정부 자료에 의하면 연간 신생아 출생수는 43만여명이며, 낙태 건수는 35만여건으로 81.3%에 이른다. 그런데 이 같은 낙태의 96%가 불법시술이다. 이로 미루어 낙태 금지는 저출산 대책이 되긴 한다. 앞서 말한 태어나선 안 되는 불행한 태아의 통계는 잡기 어렵지만, 이를 감안해도 낙태를 예컨대 50%만 줄여도 연간 신생아 수가 43만여명에서 60만5천여명으로 증가한다.
요컨대 인식이 중요하다. 낙태에 대한 찬반은 논하면서도, 정작 모태가 되는 여성의 입장을 간과하는 것은 찬성이든 반대든 간에 짧은 사려다. 태아를 낳고 기르는 것은 아이를 가진 여성의 소임인데도, 낙태 문제에 관한 남성 이기주의가 너무 심하다.
어떤 관계의 임신이든 여성 혼자 아이를 갖는 건 아니다. 상대가 있다. 이런데도 낙태의 시비에서 아이를 갖게 만든 남성은 쑥 빠진 채 여성만을 시비의 복판에 세우는 것은 가혹하다. 가령 낙태죄를 처벌하려면 임신부만이 아니고 임신을 시킨 남성도 함께 처벌하는 것이 형평성에 맞다. 아이를 낳을 여성의 처지는 전혀 고려치 않고 낙태 자체만을 논하는 남성의 이기적 판단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낙태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원칙이나, 찬반 어느 것이 옳은가 하는 선택은 인류의 영원한 숙제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낙태만이 아닌 피임도 죄악으로 볼 수가 있다. 잉태를 방해하는 피임 또한 생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섭리에 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임은 그렇다 쳐도, 정상 가정의 부부 사이에서 갖는 태아는 낙태를 금하자는 것이 틀린 방향은 아니다. 육아와 교육 여건의 개선이 산아장려의 첩경이긴 해도, 아일 지우는 것을 예사로 아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를 고치는 덴 남성들 책임이 크다. 낙태를 하고 안 하고는 여성의 판단이 우선이지만, 이의 판단엔 남성의 책임이 동반돼야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임양은 본사주필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