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제47호 주성장 이완규씨
청동기시대의 최고 명품으로 꼽히는 국보 141호 청동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지름 21.2㎝의 이 거울엔 0.3㎜ 간격으로 1㎜도 채 안되는 직선 1만3천여개와 동심원 100여개가 주조돼 있다. 그 주조 기술의 정교함, 원과 직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현대 최고의 숙련된 제도사가 확대경과 초정밀 제도 기구의 도움을 받아 그린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이 작업을 2천400여년전, 우리 선조들은 어떻게 해낼 수 있었을까. 베일에 가려졌던 다뉴세문경의 제작 방법을 밝혀낸 이완규씨(56·경기도 무형문화재 제47호 주성장)를 만나기 위해 용인에 소재한 그의 작업장을 찾았다.
● 벗겨진 2천400년전 신비의 비밀
작업장 안에는 청동 주물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서도 역시 단연 돋보이는 건 한국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다뉴세문경이었다.
“청동기 시대 유물들을 재현하다 보니까, 이게 대단한 거더라고요. 제가 청동만 주무른지도 35년이 넘었지만 이 유물들이 어디에 쓰였던 건지, 어떻게 만들어졌던 건지, 아직도 다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기자를 만나자 마자 자랑거리가 많은 어린 아이처럼 그는 다소 상기된 표정으로 청동유물들을 펼쳐 보였다.
이씨가 주성장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3년전 이 다뉴세문경을 재현하면서부터다. 조그마한 청동거울 뒷면에는 현대 슈퍼컴퓨터로는 제도조차 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한 선과 동심원으로 가득했다. 언뜻 보기에도 불가능해 보였다.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다녔을 때 다뉴세문경에 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현대과학으로도 만들 수 없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청동주물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던 그는 그 길로 담당 교수를 찾아가 “왜 말도 안되는 얘기를 하느냐”고 따졌다. “사실 전 28년전에 조그만 크기로 만들어 봤었거든요. 교수가 그러더군요. 그럼 학점을 줄테니 한 번 만들어 보라고. 그래서 파기 시작했습니다.”
청동기 시대에는 밀랍, 흙, 해감 모래, 활석 등으로 거푸집을 만들었으나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다뉴세문경의 정교한 무늬를 만들기 위해서는 진흙 거푸집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게 대세였다. 그러나 이씨의 생각은 달랐다. 섬세한 문양을 새길 때는 돌 거푸집을 이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돌에 선 하나, 원 하나씩을 그려넣기 시작했다. 활석이 아무리 무르다고는 해도 돌은 돌, 직경 20cm도 채 안되는 돌판에 1만3천개 이상의 선을 긋는다는 게 예사로운 일은 아니었다. 한달을 꼬박 매달렸다. 처음에는 돌에 새긴 문양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 수없이 많은 실패를 맛봐야 했다.
급기야 그의 손에 ‘작업풍’까지 왔다. 칼을 쥔 오른손이 퉁퉁 부어 올랐고,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일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면서 “사형수가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시키면 할 수 있을까”라고 당시의 고통을 전했다. 하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손에 각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전화위복’이었다. 손에 고르게 힘이 들어가면서 문양 그리기가 더 수월해진 것이다. 완성됐을 당시를 회고하는 그는 “내가 만들었지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신비로웠다”고 말했다.
이씨는 오기에서 시작한 작업이 결국은 2007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됐다고 털어놨다.
● 신비로운 선조들의 청동기술
오는 5월에는 다뉴세문경을 비롯해 그가 재현해 낸 청동주조물을 가지고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민족 청동기술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서다.
“지금까지 내게 있어 청동주물은 감탄이었고 도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수천년 전에도 나와 똑같은 작업을 했을 선조들의 대단함에 고개를 숙여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청동기 주조기술에 대한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그러나 청동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그에 걸맞는 연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만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그걸 단지 추정을 해야 하는 데 2천400년을 뛰어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30여년 이 일을 해왔지만 아직 멀었죠. 하지만 요즘들어 조금은 그 옛날 장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씨는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실재를 반영하지 못한 채 일본의 연구성과를 따르거나 추측성 결과들만 남발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일례를 든다며 청동검을 들어 보였다.
“(학계에서는) 청동검을 위세품이나 의식용이라고 하는 데 그렇지 않아, 만들어 보면 안단 말야.”
그가 청동검이 실제 무기로 사용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칼이 몸속으로 잘 들어가게 하기 위해 피돌기를 파놨다는 점과 돌 거푸집을 이용해 칼의 강도를 높이고 대량생산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는 마찬가지로 돌 거푸집을 사용했을 거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칼날과 칼자루를 분리해서 만든 점을 들었다. 장식용이라면 중국의 청동검처럼 자루까지 한꺼번에 만드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만들기도 쉬웠을 거라는 주장이다.
“만약 흙 거푸집에서 찍었다면 강도가 약하고 날이 물러서 무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돌 거푸집을 사용하면 얘기는 달라지죠. 강도도 세지고 찍어내자 마자 날이 서 있어 몇 번만 갈아주면 최고의 무기가 됩니다.”
● 독학으로 수천년전 기법 재현
그는 농촌출신의 50대 보통 사람으로 고등학교가 최종 학력이다. 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인 충남 청양 칠갑산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도 나오지 않은 그로서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가 취직한 곳이 조각가 오해익 선생이 운영하던 자그마한 목공예소였다. 나무를 깎는 일이 전부였다. 종을 만드는 성종사로 직장을 옮기면서 비로소 재주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다. 1981년 스스로 우리 문화재를 재현하거나 작가의 작품을 복제해 외국에 수출하는 공장을 꾸리면서 우리 문화에 대해 조금씩 눈을 뜨게 됐다.
그러나 그는 경기도 무형문화재 중 유일하게도 스승이 없다. “수천년전의 기법을 누가 가르쳐 줄 사람이 있겠습니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전통방식들을 하나 둘 찾아냈고, 현재도 찾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 둘 알아갈 때마다 우리 조상의 얼과 슬기를 느끼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면서 보람을 느낍니다.”
● 식을 줄 모르는 장인의 도전
그의 작업장 한 켠에는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물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청동으로 만든 작은 범종이었다. 종도 만드냐는 질문에 “에밀레종을 축소해 놓은 것”이라고 했다.
“7, 8년 전쯤 에밀레종 소리를 바로 옆에서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더군요. 그때부터 범종 연구에 집중했지요.”
이씨는 종소리를 들어 보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한 번은 몰래 용주사 범종을 쳐보다가 주지스님에게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고, 불국사 종소리를 가까이서 듣기 위해 상좌역을 나서서 맡기도 했다. 에밀레종 소리와 꼭 같은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과감하게 깨버렸다. 그렇게 수백번을 깨고 또 깬 끝에 최근에서야 에밀레종의 주조기법을 찾아냈다. 밀납주조기법이 바로 그것. 그러나 작은 크기로는 성공했지만 에밀레종과 같은 크기로는 아직까지도 성공하지 못했다.
“에밀레종의 비밀은 꼭대기에 있는 관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음관인줄로만 알았던 이것이 음관이 아니라 굴뚝이었던 거죠.”
에밀레종의 내부를 촬영하면 다른 종들과는 달리 불순물이나 기포가 하나도 없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이씨는 대개의 경우 차가운 틀에 쇳물을 붇지만 틀 자체를 뜨겁게 달군 상태에서 쇳물을 붇는 실험을 했다. 실험은 대성공. 틀 자체가 뜨겁다보니 불순물과 기포가 위로 떠올라 에밀레종처럼 순수한 종을 얻을 수 있었다.
그에겐 또 다른 꿈이 있다. 청동기 시대 장신구인 팔주령과 쌍주령을 재현하는 것이다. 쌍주령과 팔주령 장식 속에 쇠구슬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주물작업으로 만든 것은 틀림이 없는데 장식방울과 분리된 쇠구슬을 어떻게 속에 넣고 주물작업을 했는지 참으로 알 수가 없어요. 아직까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죠.”
1천200도의 쇳물은 장인의 손끝에서 식을 줄 모른다.
/윤철원기자 ycw@ekgib.com
/사진=하태황기자 hath@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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