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 신비한 빛의 비밀… 우주의 섭리에서 찾았다”

<30>제41호 사기장(청화백자) 한상

국보 258호 백자청화죽문각병(白磁靑畵竹文角甁). 백자병의 새하얀 공간 속에 쪽빛 대나무 그림은 한 겨울 대나무가 푸름을 간직한 채 기세 좋게 서 있는 설원(雪園)을 연상케한다.

 

수직으로 뻗은 노죽(老竹)의 모습은 유연하지만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새하얗고 맑은 백자색과 잘 어우러져 마치 한지 위에 담담하게 그린 수묵화를 보는 듯 그림 맛이 좋다.

 

그 옛날 선비들의 풍부한 시정(詩情)을 불러 일으키며 사랑을 독차지 했던 청화백자.

 

전쟁의 포화속에 끊겼던 그 맥이 수백년이 지난 지금 여주의 한 늙은 도공의 손끝에서 되살아 나고 있다.

 

밑 그림 없이 그리는 붓놀림엔 중후하면서 섬세한 터치 돋보여

원료채취부터 배합토, 초벌과 재벌에 이르는 전 과정 손수 작업

전통 장작불 고수… ‘순수성과 백치미’가 돋보인 작품으로 평가

● 천년 예술의 혼

청화백자 재현을 위해 일생을 몸 바쳐온 백웅(白熊) 한상구씨(71). 그는 경기도무형문화재 제41호 사기장(청화백자)이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던 지난 달 28일 조선 청화백자의 신비로운 빛깔을 찾아 여주군 여주읍 오금리의 삼선요(三仙窯)를 찾았다.

 

그곳에는 그 흔한 간판이나 문패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울타리도 없이 흔들흔들 쓰러져가는 3칸 허름한 집과 6기짜리 전통가마가 전부였다.

 

작업장에서는 ‘들들들’ 물레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물레를 돌리는 발길질이 바빠지고 늙은 도공의 이마엔 땀방울이 하나둘 맺히기 시작한다. 40년 물레질로 거칠어진 손가락이 갓난아기를 만지듯 조심스레 흙덩이를 쓸어올리자 어느새 유려한 곡선의 외형이 나타난다. 소매로 이마를 훔친 후 손에 물을 축인다. 경건한 의식을 치르듯 두 손으로 흙덩이 위를 감싸 잡은 뒤 이번에는 천천히 손이 내려간다. 단지의 입구가 생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쑤욱 들어간 손이 바닥을 만들고 있다. 도공의 숨소리는 바쁜 물레 발길질에 점점 거칠어지지만 흙을 만지는 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할아버지부터 도자기를 구웠어. 아버지랑 형님이 빛깔 때문에 애를 먹는 걸 보고 오기가 나더라고. 도대체 저게 뭔데 하는.”

 

당시 서른 살 농부였던 그는 도자기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무작정 도요지였던 광주 분원리에서 백자 파편들을 모아왔다. 남에게 배울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그럴 경우 흉내만 내게 될 게 불을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색과 질감이 나오고, 어떤 흙을 써야 하고, 온도는 어떻게 조절해야 하며, 유약은 또 어떻게 발라야 하는지. 박물관에 가서 진품을 관찰하기를 수십 차례 후에나 집사람과 함께 첫 가마에 불을 올릴 수 있었어요. 근데 열어보니까 몽땅 깨져 있더라구.”

 

또 불을 넣었지만 또 다 깨져있었다고 한다. 부인 서옥선씨(69)는 “나는 무안해서 방으로 들어가고, 이 사람은 바보처럼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그렇게 속상할 수가 없었다”며 당시의 속상한 심정을 드러냈다.

 

깨진 그릇을 꺼내놓고 한숨짓는 날이 계속됐고 어느새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삼중고였다. 백자를 빚어놔도 사가는 사람 없으니 생활고(生活苦)도 심했다. 한씨는 “집이 완전히 파산해 아이들과 생이별할 뻔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병고(病苦)에도 시달렸다. 일곱살때 백내장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그이기에 불편한 눈에 가마불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는 정말로 괴로웠다고 토로했다. 견디다 못해 2003년 각막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흐릿하게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해도 해도 풀리지 않는 백자의 비밀이었다. 별의별 궁리를 다 했지만, 앞을 가로막는 장벽을 넘지 못하는 괴로움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가 안될만큼 견디기 힘들었다.

 

봄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다시 깨진 그릇들을 대하며 절망에 빠져 무심코 집 앞 밭을 보던 그는 백자의 비밀을 풀게됐다.

 

“햇볕과 비와 흙이 맞아 떨어지면 싹이 절로 틉니다. 움트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뿌리가 나서 싹을 지상으로 밀어 올리는 거지. 도자기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더라구.”

 

도자기는 흙으로 빚은 그릇에 유약을 발라 굽는다. 흙 속 성분이 열을 못 견디고 표면으로 나와 색을 만들고, 이어서 유약이 녹아 그 위를 곱게 덮는다. 일찍 불을 끄면 유약이 녹지 않아 곰보가 돼 버리고 늦으면 색이 변한다.

 

“저절로 자기 색과 형태를 갖출 수 있는 조건만 찾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는 그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우주의 섭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불때기는 이튿날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2년이 지난 1985년 어느날, 마침내 고색창연한 청화백자가 한씨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순백 위에 피어나는 예술의 혼

한씨는 원료채취부터 배합토, 그림, 초벌과 재벌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직접 작업한다. 특히, 밑 그림없이 그려나가는 붓놀림은 생동감이 넘치고 중후하면서도 섬세한 텃치가 매력적이다. 또한 백웅(白熊)이라는 호에 걸맞게 전통 장작불을 고수하고 있다. 한씨의 청화백자는 ‘순수성과 백치미’가 돋보이는 작품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청화백자는 하얀 흙으로 그릇의 모양을 만들고,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를 표현한 자기이다. 처음에는 코발트를 중국에서 수입했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안료를 개발해 조선 후기에 본격적으로 제작됐다. 다른 백자와는 달리 도자기 표면에 그림을 그려 넣는데 포도나 들국화, 복숭아를 비롯한 식물들, 곰과 사슴, 거북이를 비롯한 동물들, 용이나 봉황 등이 여백과 함께 어우러진다. 그래서인지 청화백자를 보고있노라면 물체와 그림이 잘 조화된 하나의 회화작품을 보는 듯하다.

 

청화백자는 바탕을 이루고 있는 도자기의 색깔과 그림을 그린 안료의 색깔이 선명하고 부드러운 것이 특징. 여기에는 언제나 밝고 깨끗하며 뚜렷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미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 생명을 건 예술의 혼

한씨의 청화백자가 입소문을 타면서 오금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고, 세계도자비엔날레에도 그를 위한 특별전시장이 설치됐다. 일본에서도 그의 작품을 찾는 주문이 이어지고 있지만, 삶은 여전히 곤궁하다. 깨지면 또 사면 되는 공장 그릇들이 세상을 차지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 좋다는 청자랑 백자 비법이 왜 끊겼겠어요.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옛 사람들도 대물림을 안 하지.”

 

절대로 대물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지만 5년여전부터 곁에 막내아들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생명만은 걸지 말라고 했다”는데. 잠자코 듣고만있던 부인 서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생명을 걸지 말라고? 목숨 안 걸고 이걸 어떻게 한대요?”

 

목숨을 건 도공의 조선 백자 재현에 대한 열정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매번 한씨의 전통가마에 재워지는 도자기의 절반은 방법을 달리해 빚은 시험작이어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윤철원기자 ycw@ekgib.com

/사진=김시범기자 sbk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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