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 추종 세력들

임양은 본사주필 ye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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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이래서 용서 못한다

‘노무현 기대기’ 시대착오

고인이 된지 1년이 넘어 더 말하고 싶지 않은 그를, 말하게 만드는 세력이 있다. 노무현을 매명하는 정치집단이다. 그의 적자를 자처하는 사람들 또한 적잖다.

 

“멀쩡한 전직 대통령을 정치공작에 의해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은 모 야당 대표의 말이다. 몽유병 환자 같은 소리다. 기업인 박 아무개로부터 600억원 상당을 받은 혐의는 천하가 공지하는 사실이다. 검찰이 이에 피의자 소환조사를 벌인 것은 ‘만민평등법치’의 헌법정신이다.

 

묻겠다. 그럼, 혐의가 있어도 전직 대통령이므로 덮어둬야 했단 말인가, 눈감아 적당히 넘기지 않고 조사한 것이 정치공작이란 것인가,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인가, 이처럼 사람위에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보는 소린 특권의식의 심취에서 아직도 덜 깬 집권 후유증 증세다. 서초동 청사로 불러 올린 것을 두고 ‘가혹했다’는 것도 그렇다. 당연한 형사소송 절차를 문제 삼는 것은 신귀족의 우월감이다.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강변은 무책임한 정치 공세다.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던 그다. 마땅히 국민에게 법정판결을 보여줘야 할 의무를 도피했다. 그 판결엔 추징금도 포함될 수 있다.

 

그를 존경할 수 없는 것은 대통령 재직시의 공과 때문이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신념을 펴기위해 대통령을 하고자 하므로, 그의 독선에 대한 평판은 임기 종료와 함께 끝났다. 정작 실망스런 것은 봉하궁 건설이다. 그것은 민중의 지도자답지 않은 퇴임 채비였다.

 

그래도 거기까진 봐줄 수 있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미국에 저택을 사주고, 억대 금시계를 논두렁에 버리기도 한 일련의 초대형 비리는 용서될 수가 없다. 세상 어디에 이런 민중의 지도자가 있단 말인가,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을 위한다’는 민중지도자 자칭이 초심의 변질을 가져와 결국은 민중을 져버린 것이 그의 말년이다.

 

그러나 그를 비판할 자유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를 추모할 자유 또한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한가지 대조되는 분명한 사실은 있다. 지도자의 도덕성이다. 나는 이명박이 대통령이되기전, 자녀들을 서울 리라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위장전입한 것에 크게 분노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고는 300억원 상당의 재산을 사회에 내놨을 뿐만이 아니라, 월급도 전액 이웃돕기에 기탁하고 있다. 어느 대통령은 전대 미문의 초대형 비리 의혹으로 축재하고, 어느 대통령은 전재산을 세상에 내놓았다. 앞으로 ‘대통령학’의 연구 대상이다.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은 추종 세력들이 걸핏하면 내거는 구호다. 대저 뭣이 ‘노무현 정신’이란 말인가, 아마 민중의 지도자상을 빗대는 것인지 몰라도 아니다. 그것은 허상이었고, 실상은 선민의식에 젖었었다. 민중속에 더불어 사는 민중의 지도자가 아닌, 민중위에 군림하며 호사하는 민중의 지도자는 있을 수 없다. 그가 봉하궁이 아니고 김해 생가로 낙향했더라면, 나도 재임시의 공과는 어떻든 존경했을 터인 데, 불행히도 존경심을 갖지 못하게 됐다.

 

그의 추종 세력들이 진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위한다면 그를 더는 팔지 말고 고인이 편히 쉬도록 놔드려야 한다. 이것이 참다운 추모의 자세다. 노무현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들수록, 그에 비례해서 말하기 거북하고 또 듣기에 안 좋은 말이 나오기 마련이다.

 

언제까지 이승에 없는 저 세상사람에게만 기댈 것인가, 친노 세력들이 정치를 제대로 할 요량이면 자생력을 길러야 한다. 정치적 입지가 서로 다르면서, 똑같이 ‘노짱’을 입에 담는 것은 동상이몽이다.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하는 짓이 이 모양이다.

 

뻐꾸기는 알을 품지 않는다. 오목눈이 같은 참새류 둥지에 알을 낳아 참새류가 자기 알인 줄 알고 품으면, 뻐꾸기가 먼저 부화되어 나온다. 친노세력 가운데도 뻐꾸기가 있고 오목눈이가 있다. 버꾸기는 두견이과에 속하고 오목눈이는 박새과 새다.

 

노 전 대통령의 대중적 추모 정서가 현저히 떨어지는 연유 가운데 친노세력의 자생력없는 ‘노무현 기대기’에도 이유가 있는 사실을 성찰하여야 한다. 역사의 무대는 주인공을 거듭 되풀이 하는 것을 불허한다. 한 시대를 거쳐간 사람을 두고, 유훈통치의 교조로 삼는 것은 시대적 착각이다. 

 

/임양은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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