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 나무가 부처가 되고 미소가 핀다

<33>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씨

날카로운 목탁(木鐸) 소리가 공방 안 기운을 흩어놓는다. 스님들의 수행도구가 아닌 나무를 깎는데 사용되는 목탁이 생소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내 자귀날로 내리친 아름드리 나무가 쩍쩍 소리를 뱉어낸다. 그 곁에 손등으로 구슬땀을 훔치며 시원스레 미소를 짓는 이가 있다.

 

예순의 나이가 무색하게 소매를 걷어붙인 굵은 팔뚝으로 내리친 자귀날 몇 번에 굳게 다문 목불(木佛)의 입도 벌어졌다. 나무가 좋아 아호(雅號)마저 목아(木芽·나무에 싹을 틔우다)로 지었다. 우람한 외모와 달리 웃으면 하회탈을 연상시키는 그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 박찬수씨(61·목아불교박물관장)다.

 

● 故 김성수 선생과의 운명적인 만남

 

“저는 진짜 생 촌놈이었어요. 제 고향은 본래 경남 산청군 생초면 상촌리입니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 불릴 정도였지요. 화전민(火田民)으로 생계를 잇던 아버지는 열 한명의 자식중 반절 이상을 잃고선 남은 자식들 공부를 위해 무작정 상경을 결심했지요.”

 

밭뙈기 하나 없어 산에 불을 놓아 곡식을 거둬서는 겨우 입에 풀칠하던 박씨 가족에게 서울행은 또 다른 고생길의 서막을 예고했다. 가족은 이 동네 전 동네를 전전하며 동동구리무 장사를 하거나 여름에는 방장, 모기장을 파는 등 철따라 장사를 달리했다. 때문에 그는 찹쌀떡과 메밀묵, 아이스케키 노점, 쌍화탕과 목장우유 배달,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짬밥 나르는 일과 심지어 공동묘지에서 산소를 만들기 위해 흙을 파내는 일까지 닥치는대로 해야만 겨우 입에 풀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끼니걱정에만 매달리기엔 소년 박씨는 호기심이 너무 많았다. 당시 초등 6년생이었던 그는 고구마 몇 개를 품에 쥐고서는 자동차 기름 냄새를 쫓아다니며 서울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집이 있는 미아리에서 7㎞나 걸어 도착한 서울 답십리 인근에서 소년은 신천지를 만난다. 바로 반지하 창문 너머로 본 고(故) 김성수 선생이 운영하던 ‘신라조각사’. 그곳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불상, 예수상, 동물상 등의 조각품과 나무판을 지져 만들어내는 인두화는 단번에 소년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때부터였다. 조각장이 되기 위해 오매불망 ‘나무’에만 매달린 세월이 50년이다.

 

 

● 뜻이 있는 곳엔 스승이 있다

 

박씨는 고인과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했다. 가진 거라곤 몸에 걸친 옷에 달랑 고구마 몇 개를 지니고 나타난 그를 김 선생은 중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도록 도왔다. ‘쟁이도 배워야 큰 인물이 된다’는 스승의 말을 따라가니, 그곳엔 두 번째 운명의 스승, 이운식씨(73·강원대학교 명예교수)가 있었다. 당시 미술과목 교사였던 이씨는 겨울방학 숙제로 제출한 박씨의 용을 테마로 만든 목선(木船)를 보고 불같이 화를 냈다. 어디서 돈 주고 사와서는 숙제라 제출했냐는 것. 억울하고 분했던 그는 조각칼에 베여 선홍색 선명한 오른손을 들어보이며 자신의 작품임을 호소해야만 했다. 이후 이씨는 목조뿐 아니라 점토, 석고, 브론즈, 철조 등 다양한 조각분야를 이해할 수 있도록 조각의 기초와 이론을 전수했다.

 

‘청출어람’, 스승의 능력을 뛰어넘는 제자를 보는 것만큼 기분좋은 일은 없는 법. 박씨는 그런 스승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 더 열심히 목조각에 전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1967년, 제1회 박찬갑 박찬수 조각전을 열며 신고식을 치르고 인천여자실업고등학교 등에서 강의도 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그러나 1977년 일어난 유류파동으로 온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한국서의 활동이 힘들어진 박씨는 과감하게 일본행을 결심한다. 일본서 모진 고생끝에 일본의 조각명인 고(故) 가토 히로시 선생을 만나, 일본 최고 화랑이었던 다카시마 백화점에서 첫 해외전을 열어 평단의 호평과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로소 스타 조각가의 반열에 든 것이다. “뭣보다도 일본에서 나를 인정해줬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한사람으로 가슴이 벅찼지요. 또 그 일을 계기로 일본으로 한국의 불상들을 수출하게 됐어요. 일본 전 지역에 판매가 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일본에 자신이 만든 불상 등을 꾸준히 판매하면서 얻은 이익금은 고스란히 여주 목아불교박물관(여주군 강천면) 건립의 기초자금으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동서양 종교의 벽을 허물 성모 마리아상과 동자승 작품 등 英 전시회서 신선한 충격

나무에만 매달린 세월 50년 나무가 좋아 아호(雅號)도 목아(木芽)

 

● 인간문화재, 퍼포먼스를 행하다

 

지난 4월, 영국의 트라팔가 광장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붓다’라 일컬어지는 동방의 예수가 헤벌쭉 입을 벌리고 무언의 손짓·발짓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은 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봉긋한 가슴을 드러낸 성모 마리아상과 그 주위를 맴도는 동자승들은 동서양의 종교의 벽을 보기좋게 허물어버렸다. 바로 박씨가 세운 목아불교박물관과 주영한국문화원이 공동으로 개최한 ‘부처가 입을 열다’ 전시회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2008년 5월엔 세계적인 주류 브랜드인 조니워커 블루라벨을 본뜬 목조각품을 즉석에서 만들어 기념품으로 전달, 화제가 됐다.

 

박씨는 이색적이면서도 신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다가도 일어나 작업을 한다.

 

“10년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모작(模作)에만 매달렸지요. 나무를 잘 알아야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걸 알았죠. 아, 그러다 보니 ‘또 10년을 박찬수만의 작품만들기를 위해 바쳐야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강산이 변하는 주기를 지나야 하나씩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쟁이의 길. 그는 “1년 365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기에 행복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에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목아불교박물관, 제2의 삶이자 꿈의 공장

 

1만㎡에 이르는 대지 위에 조성된 목아불교박물관은 사립박물관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를 꽉 채웠다. 박물관 인근에 마련된 공방에서는 현재 둘째 아들인 우명씨(36)를 포함 전수조교와 이수조교 등이 목조각 연마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박씨는 단순히 조각법을 익히고 배우는데 그치는 1차적인 공간이 아닌, 학점을 인정해주는 제도를 도입해 조각쟁이도 석사도 되고 박사도 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는 각오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요즘 젊은이들, 내 아들도 이 일을 하고 있지만 끈덕지게 배우려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무조건 내 길을 따르라는 식은 통하지 않지요. 대신 조각분야서 다양한 일꾼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박씨는 수 많은 제자들이 그보다 실력이 좋은 인재들로 성장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염원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모네의 작품이나 로뎅의 조각 등을 보며 사람들은 단순히 ‘잘 그렸다’,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지요. 가슴으로 느끼는 무언가 찡한 감동, 그 자체를 느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나 부처의 앞에서 그저 기분이 편안해 지는, 그래서 보는 순간 민족과 종교, 성(性)을 떠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일생의 역작을 만들어보렵니다.”

 

자신의 명함에조차 스크래치 은박을 붙여, 해학을 선물하는 박씨. 30㎝ 귀여운 동자승부터 석가모니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 사천왕, 십이지, 예수상뿐 아니라 그를 인간문화재의 반열에 들게 한 법상(法床·1989년 전승공예대전 대통령상), 그리고 높이 4m의 보물 제684호 용문사 윤장대(輪藏臺) 복원까지 모두가 그의 손을 거쳐 탄생된 작품들이다.

 

2만여 점이 넘는 유물과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진정한 콜렉터이자, 쟁이의 최고의 자리인 인간문화재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오늘은 내일을 위한 또 하나의 도전이라는 생각으로 나무를 고르는 그에게 지치지 않는 장인의 기운을 엿볼 수 있다. /권소영기자 ksy@ekgib.com

 

사진 하태황기자 hath@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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