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6·25

임양은 본사주필 yelim@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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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터졌을 때 난 중학교 2학년이었다.(그땐 고등학교가 없는 중5년제다) 전쟁 소식을 듣고도 그 무렵에 유행된 “남쪽나라 십자성은 / 어머님의 얼굴…” 이란 노랫말 가요를 익히고 있었다. 38선에서 가끔 있었던 국지전으로 여겼던 것이다.

 

전황의 심각성을 인식한 것은 여자 친구의 소령인 아버지가 금강전투에서 전사한 소식을 듣고 나서다. 그로부터 며칠 안 돼 인민군이 전라남도 광주까지 물밀듯이 쳐내려와 인공 치하의 딴 세상이 됐다. 그땐 담양에서 살았는데 우리 집에 인민군이 한동안 보초를 섰다. 국군 장교였던 선친이 후퇴해 요시찰 가족이 된 것이다. 담양에 산 것도 부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까까머리 인민군이 무서웠던 게 곧 친해질 수 있었다. 나보다 두어 살 터울 위의 그는 평양제일고급중학교(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석 달 전에 징집돼 인민군이 됐노라며, 처음 보는 다발총(따발총)을 분해해 보이기도 했다. 그 인민군은 약 보름 뒤 부대가 갑자기 이동하게 됐다며 떠났다. 추측건대 낙동강전선으로 간 성싶다. 지금도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날 때마다, 전쟁에서 안 죽고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난다.

 

나는 인공 치하에서 소년단에 가입했다. 안 나가면 주목받게 된다는 어머니의 말씀도 있고 해서 나갔다. 날마다 진종일 노랠 배웠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 ‘빨치산’ 등이다. 반복 교육의 세뇌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그때 체험했다. 처음엔 좀 시큰둥하다가도 나중에는 곡조와 분위기에 절로 들떠 사이비 종교 광신도처럼 박수치며 흥겨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학살이 시작된 것은 세상이 바뀐 지 한두 달 뒤다. 인민재판을 열어 “죽여라! 죽여라!” 해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하고, 반동분자로 잡아 묶어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그땐 중학교에 학도호국단이 구성돼 배속장교가 있었는데, 배속장교 부인을 총살한 것이 업고 있었던 아기에게까지 탄환이 관통해 모녀가 함께 죽었다. 이 같은 집단 학살은 거의 (빨간)완장부대로 불리는 토착빨갱이들이 저질렀다. 토착빨갱이들의 인명 살상은 인민군이 퇴각할 무렵 더욱 심했다.

 

국군이 들어와 세상이 다시 바뀌고는 토착 우익 진영의 학살이 시작됐다. 양민 학살은 국군이나 인민군이 개입한 게 아니다. 토착세력의 좌우익 극렬분자가 자행하면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나도 그때 국군장교 가족으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게 된 것은 시골 구장이던 외할아버지 덕이다. “공기(낌새)가 이상하니까, 짐 싸들고 빨리 오라”는 전갈과 함께 소달구지를 보내 주셔서 외할아버지 집으로 부랴 부랴 떠나 학살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국군에 의해 완전히 수복이 되고 나서 광주에 살며, 한 번은 쌀을 가지러 외할아버지집에 갔던 날 밤이다. 산에서 보급투쟁 차 내려온 반란군들이 들이닥쳐(외할아버지집) 사랑방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우두머리가 일장 연설을 했다. “위대한 인민군이 곧 다시 해방시킬 테니까 양식을 자진해서 내라”며 차고 있던 권총집을 탁탁 두드리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었던 그날 밤 다행히 인명이 다친 일은 없었으나, 빼앗은 양식을 짊어지게 해 납치해 간 동네 두 젊은이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6·25는 공산주의가 뭣인가를 일깨워준 산 경험이다. 땅이 없는 농민에게 땅을 공짜로 준다는 말처럼 솔깃한 것은 없다. 그런데 정작 살아 보니까 그게 아니어서 “말 듣기보단 많이 다르다”는 평판이 영세농민들 입에서 나왔다. 예를 들면 양곡의 현물세를 이렇게 산출했다. 벼 한 줄기가 몇 알인데, 한 포기에 몇 줄기며, 한 평에는 몇 포기이므로 200평 논 한 마지 현물세는 한 줄기 벼 무게로 계산해 물량이 얼마로 나오는데, 이게 소작료보다 턱없이 높았다. 심지어는 밭 작물에서 좁쌀까지 이런 식으로 계산하고, 밤엔 인민반 세포회의다 뭐다 해 사흘이 멀다 하고 들볶다시피 해 사람들마다 고개를 설레 설레 저었다. 그토록 극성을 피웠던 현물세는 계산만 해 놓고 그해 9월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황이 바뀌어 정작 거두진 못하고 퇴각했다.

 

좁은 지면에 이 밖에도 그 많은 6·25의 참상을 어떻게 다 말하리, 사람의 목숨이 개 목숨보다 못했던 전쟁을 돌이켜 생각하면, 사소한 것에도 곧잘 인권을 말하는 지금은 사람 사는 사회가 됐다. 그런 비극을 거쳐 번영을 누리는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 벌써 60년 전이다. 전후 세대는 6·25가 마치 임진왜란 같은 역사 속 일로 들릴지 모르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6·25 남침의 동족상잔을 일으킨 북녘 집단은 민족 앞에 사과는커녕 “서울 불바다”를 들먹이며 여전히 협박을 일삼는다. 제2의 6·25가 현실이 될 수 있다. 유비무환이다. 국력을 모으는 것이 전쟁을 막는 길이다.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닌, 누릴 준비가 돼 있어야 향유되는 노력의 산물이다.  /임양은 본사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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